제목 [고현정, 이미연] 영화현장은 내겐 행복이지만 절실한 장소야
출처 cine21 (글 : 김혜리 | 사진 : 오계옥 | 201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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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라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반면 기자이기에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인터뷰가 있다. 16년간 매주 영화잡지를 만들며 배우를 만났으나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고 이제야 고백하련다. 김지하 시인의 시구를 막무가내로 인용하자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우상인 동시에 무당인, 지긋지긋하게 예민한 동시에 폭력적으로 대담한 이 희귀한 ‘종족’에게, 특별한 예술가들에게 우리는 번번이 이족의 언어로 눈치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능하다면 아바타의 몸이라도 빌려입고 배우들의 나라에 잠입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을 냈다. 우리가 배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업상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배우에게 기자가 되어달라고 매달려보자. 조심스레 인터뷰어의 자리에 청한 배우 가운데 고현정이 “오케이!”를 외쳤다. 그녀가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 한 배우는 이미연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이미연은 예정된 다른 스케줄을 앞으로 잡아당겨 봄날 하루 저녁을 여유롭게 비웠다.



아파서 잊히지 않는 대사가 있다. 이재용 감독의 1998년작 <정사>에서 이정재는 극중 서른여덟살의 이미숙과 헤어지며 쓸쓸히 말했다. “가엾은 사람. 이젠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이도 없을 텐데.” 그 뒤로 세상도, 나이에 관한 우리의 감각도 많이 달라졌다. 극중 이미숙의 나이를 이미 넘은 이미연과 고현정에게 인용한 대사보다 당치 않은 연민은 없을 것이다. 1971년생 여자들의 은근한 자부심인 그녀들은 여전히 대중에겐 사랑의 여신이며 연출자들의 뮤즈다. 로맨스 장르에서 나이든 남성 스타와 젊은 여성 스타의 짝짓기는 질긴 관습이지만, 이미연과 고현정의 멜로드라마를 상상할 때 파트너의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연하 남자배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들의 자태가 여전히 맑고 생기 넘쳐서만은 아니다. 그보다 시간이 그녀들을 남자의 사랑뿐 아니라 존경까지 차지해버리는 강하고 넉넉한 여인으로 숙성시켰기 때문이다. 고현정과 이미연은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였던 사랑스러움을 간직한 채,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의리와 명예까지 대변하는 배우가 되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같은 해 입학해 친구가 된 이미연과 고현정은 아주 일찍 사랑을 믿어 스물다섯 이른 나이에 뛰어들 듯 결혼했고 생의 한 장(章)을 넘긴 뒤 다시 독신이 되었다. <선덕여왕> 시작 무렵 이후 처음 만난다는 두 사람은 인터뷰 자리에서 불현듯 오래된 추억의 조각들을 캐내고 서로의 현재를 확인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을 주고받았다. 바로 1분 뒤를 모르는 상황을 즐기는 배우 고현정은 스타카토로 질문을 던졌고, “나는 배우다”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예비하는 배우 이미연은 레가토로 받았다. 옆에 있는 서로를 확인하듯 “미연아”, “현정아” 하는 호명이 유난히도 자주 말꼬리에 따라붙었다. 내리는 어둠과 함께 둘은 점점 더 다가앉았다. 평생 그랬듯 시간은 그날 밤에도 두 여자의 편이었다.




배우 고현정, 배우 이미연에게 묻다

 



고현정_1990년에 동국대학교에 함께 입학했을 때 이미연은 최고의 스타였고 옆에 갈 수 없는 존재였어. 아직 기억나는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무대에 한명씩 올라가 선배들이 던지는 혹독한 질문을 견뎌야 하는 순서가 있었잖아? “<빙점>의 여주인공 이미연!” 하고 호명돼서 네가 올라갔는데 선배들 중 아무도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한참 바라만 보고 있었어. 질색하는 표현인 건 알지만, 그때 너 정말 굉장히 아름다웠어. 나 역시 미스코리아가 된 다음 입학했지만 내 존재는 아무도 모를 때고 난 대중이 배우 보는 마음으로 동기인 너를 봤지. 미스롯데에 당선되고 <하이틴> 잡지에 나오는 걸 보면서 “최수지 이후 이렇게 예쁜 사람이 또 있나!” 하고 있다가 학교에 와서 직접 만난 거야. 본인은 몰랐을지 몰라도, 네가 움직이면 동국대 전체가 술렁이고….



이미연_얘 또, 오버한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 (웃음) 고등학생 때부터 활동하느라 힘들어서 대학만 가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선배들 눈매가 곱지만은 않았어. 오히려 온통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위압당하니까 난 좀 주눅 든 상태였어.



고현정_7시까지 청소하러 나오라고 해서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혼났지.



이미연_이름이 알려진 우리한텐 본보기 삼아 더 엄격했지. 따로 불러 엎드려뻗치라고도 하고.



고현정_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연 성격이면 아무리 선배라도 들이받았을 것 같은데 왜 가만히 있었던 거니?



이미연_글쎄. 내가 들어간 집단의 원칙이니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알다시피 나는 성격이 세다고 생각하지 않아. 불가피할 때만 세지는 거지.



고현정_잠깐, 그런데 도대체 네가 언제부터 센 사람으로 보이게 된 거니?



이미연_아무래도 혼자 되고 <명성황후>를 하고 나서 이미지가 잡힌 게 아닐까? 대학 다닐 때엔 내가 현정이 널 많이 좋아했어. 지금도 말랐지만 그때는 키도 큰 애가 더욱 비쩍 말라서는 휘청휘청 점심도 요거트 하나밖에 못 먹고, 꼭 내가 보호해줘야 할 것 같았어. 일기에도 그런 이야기를 썼어. 너랑 남자 동기 두명이랑 넷이서 난생처음 압구정동 카페도 가보고 그랬지.



고현정_그런데 그 넷 중 셋이 이혼했잖아. (웃음)



이미연_어머! 그런 이야기는 왜 해? 할 얘기만 하세요. (웃음)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3학년까지는 연예활동을 자제해달라고 했는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학교생활이 편치만은 않았어.



고현정_넌 기억 못할 텐데 그때만 해도 집에 녹음테이프 달린 자동응답기가 있었는데….



이미연_어머! 그런 이야기는 왜 해? 완전 옛날 배우 같잖아. (웃음)



고현정_네가 먼저 우리 집에 전화 걸어서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겨줬어. 신기하고 고마워서 진짜 너한테 평생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좌중 웃음) 스타인 것도 있지만 친구 사이에도 먼저 손짓해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웠어. 학교에 갈 때면 “미연이가 오늘은 학교 올까?” 생각하곤 했지. 카페에서 같이 놀다가도 넌 <사랑이 꽃피는 나무> 촬영을 가야 했던 기억이 나. 우리랑 더 어울리고 싶어서 대본을 쥐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혹시 취소될 수도 있어” 하다가, 결국은 일하러 갔지. 안쓰러웠어.



이미연_그럼 넌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고현정의 데뷔작 드라마)를 2학년 때 한 건가? 네가 상의했는데 내가 아마 하지 말라고 했었지. (웃음)



고현정_극중 이름이 황말숙. (웃음) 한참 망설이다 작품이 내 이미지랑 잘 맞지 않으니까 하지 말라고 진심으로 조언해줬고 넌 공부나 다른 일도 잘할 것 같으니까 다른 일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어.



이미연_노력에 비해 어린 나이에 주목받고 일을 해오면서 여배우의 생활과 연기라는 작업이 힘들다고 생각했나봐. 당시에 넌 MC도 보고 진행도 잘했으니까 그렇게 일하다가 결혼하는 것도(웃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맘때만 해도 여자가 스물대여섯살에 결혼하는 게 맞다고 고지식한 생각을 했거든. 넌 언제 결혼했지? 난 95년 3월.



고현정_난 5월. 넌 그때 왜 결혼했니?



이미연_그때는 진짜 빨리 한 남자의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



고현정_너가 학교 다니면서 그런 적 있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지금도 그래?



이미연_남자배우라면 배우로서의 생활이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거야.



고현정_예술사 수업이었을 거야. 네가 제출하는 리포트를 보고 깜짝 놀랐어. 무슨 교수가 쓴 것처럼 근사한 글이었는데, 그걸 툭 내면서 자문자답하듯 “이게… 연기하는 데에… 도움이 되나?” 중얼거렸어. 얼마나 멋지던지. 너는 말하자면 내가 가까이서 처음 본 배우여서, 네 모습은 뭐 하나라도 눈에 담았나봐.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저런 건가보다 생각했지.



이창동 감독님, 최민식 선배랑 일해보고 싶어



이미연_새 영화(<미스 고 프로젝트>(가제)) 리딩은 했냐? 너, 첫 번째 상업영화 아니니? 떨리겠다.



고현정_응. 나, 시나리오 있는 영화는 처음 해봐. (좌중 폭소) 지금까진 홍상수 감독님 영화랑 이재용 감독님 <여배우들>을 했으니까. 떨려야 옳은데 제작자와 스탭 중에 대학 동기가 많아서 무슨 워크숍 가는 것 같아. 네 첫 영화는….



이미연_<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고현정_그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디?



이미연_분명히 아니지. 너랑 나랑 공부 잘했니? 그런데 지금 제법 훌륭하게 잘 살고 있잖아. (웃음)



고현정_이미연씨, <씨네21>은 자주 보시나요?



이미연_요즘은 영화를 안 하니까 가끔만 읽어. 영화가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안 맞아떨어질 때는 그냥 외면하게 되는 마음도 있잖아.



고현정_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데?



이미연_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영화. 긴 러닝타임을 다 따라가고 났을 때 행복하고 따뜻한 기운이 오는 영화였으면 좋겠어. 최근에 인도영화 <내 이름은 칸>을 봤는데 충격이었어. 아, 영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 다시 인식했어.



고현정_너는 어떤 감독에게 끌리니? 배우인 우리가 어떤 감독님이 좋네 먼저 이야기하는 게 좀 이치에 안 맞지만, 그래도.



이미연_기본적으로 난 영화는 여운이라고 생각해. 수·목요일에 방영되면 목요일 저녁에 대중의 반응이 나오는 TV드라마에서 얻는 것도 크지만, 영화는 보고 난 일주일 뒤에도 그 인물이 왜 그랬을까, 달리 인생이 흘러갈 순 없었을까 계속 생각하도록 만들거든. 내가 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줄 감독이 누굴까 생각해보면 이창동 감독님이 먼저 떠올라. 작품 중에서 <초록물고기>를 제일 좋아해.



고현정_너도 무슨 물고기 영화 하지 않았니?



이미연_그건 <물고기자리>고. (좌중 폭소)



고현정_내 별자리가 물고기자리인데. 죄송합니다. 공연하고 싶은 남자배우는? 일단 30대 이상 중에서.



이미연_요즘 배우들이 몇살인지도 잘 몰라. (웃음) 사람을 집중시키는 연기를 하는 최민식 선배님이랑도 해보고 싶고.



고현정_만약 너랑 최민식 선배님이 연기하고 거기다 이창동 감독님까지 합류하면…, 어우… 여운은 대박이겠다. (좌중 폭소)



이미연_어찌보면 내가 그리 상업적이지 못했다는 생각도 해. 일단 흥행이 잘돼야 계속 영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경험해놓고도 편승하고 싶진 않았어. 내가 찍은 영화가 다수에게 박수받길 원치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지루하잖아. 민식 선배랑 내가 만나도 잘 조율해줄 감독을 만나면 충분히 네가 말한 우려를 상쇄할 에너지가 있다고 봐.



고현정_또 너 누구랑 해봤지? 최민수 선배, 한석규 선배, 박신양 선배, 그리고 이병헌씨도 있구나. 그중에 누가 제일 진상이었어? (웃음) 농담이야. 한 사람만 꼽으면 누구랑 다시 하고 싶어?



이미연_모두 워낙 개성이 강한 분들이라. (망설인다) 글쎄다. 병헌씨가 별로 좋아하진 않겠지만, 이병헌씨? (웃음)



고현정_세 사람이랑 키스신도 다 해봤지? 어땠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 안 난다고 하자) 에이, 그런 건 적어놓아야지.



이미연_너는 뭐 안 해봤니? 조인성군과도 했잖아?



고현정_네가 거명한 분들하고는 못해봤지. 세 배우가 키스신하기 전에 어떻게 준비해?



이미연_얘, 그런 건 기억도 안 나. 내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상대배우가 뭐 하는지 언제 살피니? 넌 진짜 여유있나보다. 나는 그렇게 현장에서 여유있지가 않아, 현정아.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현장에서 즐기는 편은 아니야. 그게 내 최대 단점일 수도 장점일 수도 있는 것 같아.



고현정_왜? 안 즐거워?



이미연_영화현장에 있다는 사실은 아주 행복해. 그런데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영화를 했던 것 같아. 난 어렸을 때 이미 슬럼프가 한번 왔었잖아. 영화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너무 어린 나이에 절감했기 때문에, 내겐 영화현장이 너무 절실한 장소야.



고현정_예를 들어 영화 안 하고 드라마하면 되잖아?



이미연_아아, 이놈아. 네가 이번에 상업영화를 하고 나면 다른 마음이 들 거다. 드라마를 폄하하는 생각도 없고 각기 좋아하고 잘하는 장르가 있다고 봐. 하지만 나는 좋은 영화를 할 기회가 계속 있었다면 중간에 드라마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물론 드라마 덕분에 많은 걸 누려. 어린이들까지 이름을 알아주고 대중에게 기반을 넓히는 데에 드라마만큼 훌륭한 장이 어디 있겠니? 그럼에도 영화현장에 있으면 달라. 너무 감사해. 배우를 더 배려해줘서가 아니야. 현실적으로 방송은 처음에는 무한한 약속을 하다가도 결국은 대본 외우기에 급급해서 연기하게 돼. 그런 작업이랑 시나리오 읽고 감독과 대화하고 고민하면서 한컷을 서너 시간씩 작업하는 것은 책임감의 무게가 달라. 그림 하나를 만들기 위해 꼼지락 꼼지락 서너 시간 조명하고 강풍기 돌려 스크린 위에서 완성된 결과를 볼 때의 희열을 드라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거지.



고현정_네가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야. 난 그런 상황이 도리어 부담스러울 것 같거든. 게다가 그 희열을 사람들이 몰라줄 때도 많잖아. 그럴 때는 어떻게 하니?



이미연_가끔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에서 가장 열심히 한 신은 어떤 신이에요?”라고 묻는데 굉장히 촌스러운 질문이라고 생각해. 메이킹 필름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 촬영과정이 공개되는 시대지만, 그래도 난 이 작품에서 이 캐릭터를 연기하며 그의 무엇을 제일 사랑했는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건 관객이 스스로 보고 찾아내줄 때 진정 기쁜 거야. “미연씨, <중독>에서 그 장면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요? 저도 제일 좋아하는 신인데”라고 대꾸할 때 행복한 거지. “제가 이러저러한 신을 진짜 열심히 했어요. 봐주세요” 하면 사람들은 영화 보면서 “엄마 죽고 통곡하는 신을 제일 열심히 했다던데 언제 나오나?” 하고 그것만 기다릴 거 아니야. 그건 재미없지.



고현정_그럼 한컷도 열성을 다하지 않은 게 없다며 다 보라고 하면 되잖아. (폭소)



이미연_그럴 순 없지. 완급조절은 분명 필요하니까. 물론 감독이 흐름을 조절하고 사후에 편집 과정도 있지만, 드라마보다 영화에서 배우가 전체의 기승전결을 타고 가는 작업이 굉장히 재미있는 거야.



남녀 관계에서도 우정이 중요하다고 믿지




고현정_오늘 꼭 알고 가야겠다. 영화할 때 감독은 어떤 존재야? 넌 작품을 많이 했으니 감이 올 것 아니야. 어떤 모습을 보이면 후진 감독인 거야?



이미연_자기중심이 없는 감독이지. 무엇이 됐든 자기중심이 있어야 고집도 이해가 되고 흔들림도 이해가 되지. 간혹 촬영감독이나 조명감독의 힘이 세거나 배우의 경력이 길거나 나이가 위거나 할 때 동요하는 감독님들이 있는데 그러면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영화는 배우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안돼. 감독이 똑똑해야 해.



고현정_그래? 그럼 영화 찍기 전에 그걸 어떻게 알아볼 수 있어?



이미연_그래서 우리가 속기도 하고 감독님들이 우리에게 속기도 하겠지. 잘할 줄 알고 캐스팅했는데 연기를 못할 수도 있고. 한 5회 정도 촬영해보면 서로 알 텐데 미리 찍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고현정_시나리오를 먼저 받고 마음에 들면 감독을 만나니? 만나면 뭘 어떻게 이야기하니? 감독의 말을 듣는 편이야, 네 얘기를 하는 편이야?



이미연_질문을 많이 해. 이번 영화에서 뭘 보여주고 싶은지, 어떤 상황에서 구상했는지. 무엇보다 내게 프러포즈한 역할이 나랑 어디가 닮았다고 믿으며 어떤 표현을 기대하는지.



고현정_그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오로지 미연씨만을 생각했고 미연씨밖에 없으니 꼭 해줘야겠다”고 끝까지 말하는 감독이 널 설득하니, 아니면 “실은 다른 배우를 하려고 했는데 어긋났다. 그래서 미연씨에게 부탁한다”고 완전히 터놓고 이야기하는 감독이 널 설득하니?



이미연_사람인 이상 전자가 고맙긴 하지. 주인공 이름까지 나랑 비슷하게 지어와 프러포즈한 적도 있었어. 그런데 진실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거짓말은 바로 인지하는 편이야. 다른 배우에게 갔다가 온 작품도 내가 더 잘할 확신이 들 때는 출연해. 꼬맹이 시절에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도 여겼는데 결국은 진짜 작품의 임자가 있는 거라고 여기게 됐어. 물론 신경은 쓰이지. 예를 들어 같은 역할을 A에게 먼저 섭외했는데 나랑 그가 아무 공통분모가 없어 보인다면 아무나 해도 된다는 걸까, 감독이 중심이 없는 게 아닌가 불안하지. 그런데 요즘 과연 ‘적역’이란 게 있을까? 오직 한 배우를 위해 기획되고, 특정 배우가 못하면 엎겠다는 영화는 이제 없을 거야. 그런 영화를 바라지도 않고.



고현정_난 네가 멜로드라마를 한번 더 했으면 좋겠어. <어깨너머의 연인>처럼 세련된 스타일 말고, 90년대 초풍의 선남선녀 등장하는 완전 멜로. 러브스토리에는 관심없어?



이미연_나는, 기본이 사랑인 것 같긴 해. 사실 모든 영화의 기본이 사랑이지.



고현정_영화는 그렇다치고 네 감정상태의 기본이 사랑이니?



이미연_사랑이 없으면 왜 살아?



고현정_명예라든가 다른 가치도 있잖아. 어떤 순간에 사랑이 충만하다고 느껴?



이미연_명예나 자존감도 중요하지만 그건 사랑 다음이야.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뭔가를 양보하고 져줄 수 있을 때, 그에게만 내가 허용하는 무엇이 있음을 느낄 때 행복한 게 아닐까, 현정아?



고현정_그런데 우리는 소개팅을 할 수도 없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냐? 어떻게 해야 되냐? (울부짖음에 좌중 폭소) 체력도 달리고 물리적으로 지칠 때면 아무 필요없고 건장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근데 아무래도 여자한테 기대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니? 웬만한 여자는 나보다 작기도 하고. (폭소) 그런데 사랑했다가도 싫증날 수도 있잖아?



이미연_나는 사람에 대한 싫증은 별로 없는 것 같아. 함께 보낸 시간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니까…. 남녀 관계에서도 우정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먼저 그것을 깨는 순간이 오는 건 싫을 것 같고 흔들리는 마음 자체가 두려울 것 같아.



고현정_왜 눈이 촉촉해지니, 바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가 배우를 하지 말라면 안 할 수 있어?



이미연_모르겠어. 다만 살면서 마침표, 쉼표, 말줄임표를 잘 찍어야 하는 것 같아.



고현정_너를 처음 보면 남자들이 대개 어떻게 행동하니? 잘해줘? 웃음을 주려고 해?



이미연_글쎄다. (생각) 일적으로가 아니라 우연히 자리를 함께하는 때에는 뭔가 가진 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대학 동기 친구와 있는 자리에 모르는 분이 온 적이 있는데 아주 비싼 샴페인을 시키는 거야. 나중에 친구에게 뭐 그런 과용을 하고 그러냐고 물으니까 남자들이 널 만났을 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어필하려고 그러는 걸 테니 이해하라더라. 그런데 나는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게 많은 남자들에 대해 경계심 비슷한 마음이 있는 것 같아.



고현정_얻어먹기만 하는 남자들도 얼마나 많은데, 사주는 남자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다들 나는 너무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줄 생각을 안 하더라. (좌중 폭소)



이미연_그래서 나는 과시가 없는 사람, 겸손한 사람, 배려하는 사람, 서빙하는 종업원에게 고맙다고 꼬박꼬박 인사하는 사람이 좋아. 덜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한테 함부로 대하면 딱 싫어져.



고현정_참, 너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랬지?



이미연_언젠가는 꼭.



고현정_그럼 한국의 조디 포스터가 돼버리렴.



이미연_그건 내 이기심 때문에 싫어. 물론 편모나 편부 가정이 불안정하다고 생각진 않아. 하지만 내 자신이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부모님이 다투고 화해하며 사는 평범한 과정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내가 혼자서 부모 역을 감당할 만큼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해. 현정이 너도 그럴 거야. 우리 배우들의 삶은 대체로 한쪽으로 편중돼 있어. 연기를 위해 독서하고 영화를 보고 그 분야에서는 상당한 지점에 올랐을지 몰라도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은 부족해.



고현정_나는 공항바보잖아. 공항 가면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웃음)



이미연_어디 공항뿐이겠니? (폭소) 어려서부터 이쪽 일을 한 나는 솔직히 혼자서 어딘가를 걸어본 적조차 없었어. 몇해 전 생전 처음 외국에 한달간 혼자 여행을 갔어. 별일 아닌데도 나로선 진짜 용기가 필요했어. 그런 시도를 한 이유는…, 난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 좋은 인격체가 되고 싶어. 나중에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다면 좋은 엄마도 되고 싶고. 너도 알다시피 난 그리 공주같이 사는 연예인은 아니야. 할 일은 다 해. 하지만 어디까지나 집 안에서 그런 거지 집 밖에서 움직이는 일에는 서투른 거야. 그걸 깨고 싶어서 여행을 갔어. 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처음이었는데 가자마자 몸도 아프고 힘들더라.





연기할 때 부자연스러운 화장은 굉장히 싫어



고현정_가만. 너의 멜로영화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



이미연_멜로 하고 싶어. 그런데 이제 내가 멜로드라마를 하려면 벗는 연기를 한다거나 대중이 보기에 좀 새로운 면모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될 때도 있어. 그런데 난 노출 연기 자체가 편하진 않아. 사실 지난 작품을 다시 보면 난 약간 후회가 될 정도로 메이크업이나 의상에 설정이 없어. 연기할 때 속눈썹 붙이거나 부자연스럽게 진한 입술화장을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 처음에는 이번에는 달리 가보자고 설정했다가도, 좋은 연기가 있고 그 다음에 헤어, 의상, 메이크업이 있는 거라는 생각에 결국은 또 편안한 스타일로 가게 돼. 이렇게 입으면 아주 예쁘다는 걸 알아도 화보촬영도 아닌데 동작이 불편해서 연기에 거슬리는 걸 못 참는 거지. 그런 내가 과연 노출연기가 편할 수 있을까? 배우로서 부족한 면일 수도 있지. 아무튼 최근에 접해본 시나리오는 멜로드라마보다 주로 아이가 얽혀 있는,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죽거나 폭력에 희생되고 거기 대응하는 이야기들이 많았어. 잘 와닿지가 않았어. 공백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도 물론 있어. 나이란 얼굴이든 뒤태든 목소리든 무엇으로나 표현되게 마련이고, 연륜으로 보태지는 것도 있지만 지금 못하면 영영 못하는 역할이 있는 거니까. 특히 영화는 내가 이 작품을 거절한 다음에 더 괜찮은 작품이 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어.



고현정_질문이 항상 부정적이어서 미안한데 어떤 배우가 한심하다고 생각해? 에너지를 못 주는 밋밋한 배우?



이미연_현정아, 나는 솔직하려고 한 한마디가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



고현정_그럼 고쳐 물을게. 널 싫다는 사람들은 뭐가 싫다고 말하니?



이미연_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런 점에서 난 모니터링에 게으른 배우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는 걸 아니까 10명 중에 10명이 나를 다 지지하는 것보다 10명 중에 3명이 강하게 응원해주는 게 내겐 중요해. 너더러 싫다는 사람들의 이유는 뭔데?



고현정_늙었는데 주책 그만 부리라거나 이혼했으면 조용히 숨어살 것이지 왜 저러냐고 하지. <알까기> 같은 프로그램 한번 나가고 나면…. (좌중 폭소)



이미연_그런데 비난의 초점이 동전이 딱 뒤집히는 꼭짓점 같은 거라서, 솔직해서 좋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같은 면인데 한번만 꺾이면 “기가 세 보인다”가 되는 거잖아. 반박하라고? 그러고 싶진 않아. 분명히 기는 세야지 연기를 하는 것 같아. 굳이 네가 아까 한 질문에 답하자면 집중 못하는 배우가 별로인 것 같아. 우리 시대가 연기 외에 많은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걸 인정하지만 그래도 기본을 무시하고 패션이나 트렌드 좇기에 급급하다거나 다른 외적인 목표 때문에 이 영화나 드라마를 선택했다는 게 눈에 보일 때 애석하지.



고현정_그런 면에서 나는 몇점이야?



이미연_아니 그렇게 몇 작품 안 하지 않으셨어요? (좌중 폭소) <선덕여왕>을 다 보진 못했지만 내가 너(미실) 죽을 때 문자 보냈을 거야. 기본적으로 너는 마음을 담아내는 배우야. 반면 <대물>은 첫회인가를 재미있게 본 다음 마지막회를 봤는데 대국민 연설 장면에서 100% 마음을 못 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넌 연기를 왜 하는 것 같니?



고현정_밥만 먹고 놀 수는 없잖아.



이미연_얘는 말은 꼭 이렇게 해요!



고현정_진짜야 미연아. 그럼 뭘 하겠어, 내가? 만날 놀아? 난 일 안 하면 놀 사람도 없어.



이미연_한 분야에서 이렇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네가 다른 일을 하자면 왜 못하겠니? 난 진짜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어. 혜수 언니는 그림 그리신다 하고 누구는 사진 잘 찍는데 나는 다른 재능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잘하는 건 집안 청소 정도?



고현정_그런데 우리가 어려서는 술 마시는 건 우리랑 상관없는 문화인 줄 알고 살았잖아? 넌 술을 마시니까 무지 ‘여자’가 되더라? 누구든 기대서 다 털어놓아야 할 것처럼 감싸주고.



이미연_남자들이 있으면 내가 또 안 그래. 방어적이 돼. 영화 하는 여자 동료, 선배들한테는 애교를 부리는데 남자감독님을 만나면 (굵은 목소리로) “아, 반갑습니다” 하고 전혀 여성성을 발산하지 않고 응대하게 돼. 일찍부터 일하다보니 남자동료들이 나를 여자로 인식하는 게 싫었나봐. 그런데 내가 만약 여성감독이라면 똑같은 조건의 남자배우 둘이 있을 때 남자로서 매력을 발휘하면 그쪽이 더 좋을 것도 같거든? 사실 연기자는 점수로 딱 매길 수 없잖아. 남녀가 이성으로서의 매력에 끌리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억지로 많이 거부한 거지.



고현정_나는 남자가 좋은데. 여기서 너랑 내가 큰 차이가 있다. 넌 조금만 여자다워도 그렇게 보니까 방어를 해야 하는 거고 나는 “아아앙” 하고 애교를 부려야 겨우 편하게 보니까 언제나 돌아이가 될 뿐이고. (좌중 폭소)



쉴 때는 감성을 쉽게 자극받는 상태로 만들어놓으려해




고현정_이혼하고 나서 연기폭이 넓어지는 여배우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기자도 있는데, 나는 결혼생활 때나 이혼을 했다고 그 감정이 연기에 직접 도움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 엄마가 돼봤다고 아기를 안을 때 특별히 달라지진 않았어. 이상하게 연기할 때는 스무살 그때 기분이 되더라고. 다만,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아본 처지이니 예전에는 약간 못해도 되고 어설퍼도 괜찮았던 연기를 사람들이 용납해주지 않을 것 같은 거지. 그래서 실제로 나는 크게 안 변했어도 괜히 능수능란한 척하면서 연기하면 “이젠 좀 하네”라는 반응이 올 때도 있었고. 태도의 변화도 연기력으로 봐주시는 거지.



이미연_그래? 나는 굉장히 다를 것 같은데? 경험한 걸 표현하는 거랑 못한 걸 표현하는 건 차이가 나지 않을까? 예컨대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보지 않은 배우가 베드신을 연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르지 않겠어?



고현정_근데 이런 거야. 우리가 사실 아직까지는 극중에서 남자를 많이 만나는 캐릭터로 분하는 경우는 드물잖아. 말하자면 처녀 같은, 누가 항상 옷고름을 끌러주는 역할이랄까. 그래서 미숙했던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지. 베드신은 안 해봤지만 만약 현재의 내가 그런 장면을 찍는데 현장에서 쭈뼛거린다면 모두 어이없어하겠지? 그런 걸 고려해서 일부러 담담한 태도를 취할 거라는 말이야. 경험을 해봐서가 아니라.



이미연_나는 결혼했으니까, 이혼했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스물세살에 결혼 발표하고 스물다섯살에 결혼을 했잖아. 청춘물을 해야 할 시기에 청춘물을 못했고 결혼 이후에는 <넘버.3>나 <주노명 베이커리>나 대부분 유부녀 역을 했어. 결혼하면 여배우의 극중 나이가 점프하는 시대였어. 그러다가 오히려 혼자가 되고 나서 <인디안 썸머> <중독>에서 싱글 여성으로 나온 거야. 순서가 바뀐 거지. 어떻게 보면 네가 복귀했을 때 일하는 환경이 더 좋았다고도 할 수 있어.



고현정_너는 참 잘 울지.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많이 울잖아.



이미연_나는 연기를 하지 않는 시간 동안 앞으로 좋은 작품 만날 걸 대비해서 감성을 쉽게 자극받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싶어 하는 면이 있어. 정말 지치면 뭘 봐도 눈물이 안 나고 감동도 없고 누군가가 슬픈 얘기를 해도 “음, 난 더 안 좋은 일 있었는데” 생각하거든? (웃음) 그런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써. 안 그러면 어느 순간 좋은 작품이 와도 못할까봐서.



고현정_왜 그렇게 항상 연기자로 살아?



이미연_아직 마침표를 찍을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난 정말 좋은 배우로 남고 싶고 내 마음에 자신있게 남길 좋은 영화를 하고 싶어서 계속 기다리고 기다려. 이러다 결국 못 만나고 멈출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날까지는 스스로 나를 다치기 쉬운 애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작품이 불만스럽게 끝나면 너무 무서워. 하늘만 파래도 감사하던 마음이 온데간데없고 음악도 다 시끄럽기만 해. 혼자 힘으로 해결 안되는 그런 상황에서는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한 부분에 대해 잘했다고 쓰다듬어주고 그래도 이걸 얻지 않냐고 환기시켜주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 (글썽)



고현정_그런 사람들이 무지 많은 거 알지?



이미연_많진 않지. 아무튼 누군가에게 계속 사랑받고 바로 사랑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배우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해. 넌 눈물이 없니, 뭐? 마찬가지지.



고현정_난 돈 줘야 울어. (좌중 폭소)



이미연_네가 마음으로는 더 울고 있을 수 있겠지, 현정아. (도리질치는 고현정) 난 네가 연기하기 힘들어도 분명 행복한 부분이 있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해. 그걸 네가 인정하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그래서 연기한다고 대범하게 말하다가,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책임감없는 배우로 오해받지 말았으면 좋겠어.



고현정_(응석 피우는 말투로) 배우가 꼭 책임감있어야 해? 공무원도 아니잖아. 촬영시간에 제대로 나가고 연기를 잘하는 것 말고 다른 책임을 져야 해?



이미연_설명하자면, 난 배우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 정말 노력했던 것 같거든. 결혼 뒤에 주말연속극 주부 역할도 많이 들어왔지만 다 사양하고 영화의 조연을 하면서 기다렸어. 난 조연상도 세번 탔어. 그래서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로 인해 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크린에 내 이름이 제일 먼저 나가는 것만한 책임감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맏딸인 네가, 내가 아는 현정이가 어떻게 네 영화에 책임을 안 지겠니?



아기를 낳고 키워보는 경험은 해보고 싶어



고현정_우는 연기할 때 무슨 생각해? 넌 눈망울이 그대로인 채 갑자기 투둑하잖아.



이미연_‘투둑’하는 신이 많은 작품을 해서 그래. 실은 ‘투둑’ 안 하고 멈추는, 참는 연기를 하고 싶은데 항상 여배우들한테서는 감정의 결과물을 뚜렷이 보길 바라는 감독님들이 있어. 사실 난 진짜 슬프면 눈이 빨개져서 목에 핏대가 서는데, 어쨌든 바스트숏 들어가면 투둑하길 원하실 때가 많아. 눈물을 안 흘린 테이크가 나한테는 진짜인데 어차피 나한테는 권한이 없으니까.



고현정_웃긴 질문인데 나한테서 뺏고 싶은 건 없니?



이미연_그런 건 없고 아기를 낳고 키워보는 경험은 해보고 싶어. “엄마”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나랑 똑같은 딸이면 좋겠어. 조금 욱할 때는 있지만 부모님한테 대체로 잘하는 딸이거든.



고현정_어떤 때 욱해?



이미연_연기를 안 해본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잖아. 추워요, 더워요, 그냥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걸 위해 감정을 끌어냈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게 너무 힘들다고 했을 때 “그래도 해내야지” 식으로 대답하시면 속상해.



고현정_그럴 때 가족이나 연인을 제외하고 누가 제일 너를 이해해주면 좋겠어?



이미연_당연히 매니저지. 감독은 현장에서 나를 잘 이끌어주길 바라는 상대고, 힘든 부분을 이해받고 싶은 건 매니저야. 일하면서 같이 가는 사람이 내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어?



고현정_매니저를 굉장히 챙겨준다고 들었어.



이미연_멋지게 큰 걸 해주진 못하고 그냥 조금씩 꾸준히. 나보다 어린 사람들인데 나를 챙기고 이해하기가 얼마나 버겁겠어? 그런데도 굉장히 노력해줘. 내가 원래 누굴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 예전 매니저가 손톱 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촬영장에서 그놈 손톱 정리해주곤 했어. 내가 그만큼 성숙한 인간인지는 몰라도 누군가를 돌보고 뭔가를 가꾸어주는 일이 좋아.



고현정_이야기하다보니 생각났다! 대학 시절에 네가 호암아트홀에서 연극을 해서 우리가 보러간 적이 있었어.



이미연_<파우스트>의 그레첸 역이었지.



고현정_같은 길을 뒤따라가고 있는 입장이었는데 그날 네 연극을 보고 연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도 배우를 하면 저런 굉장한 무대에 서야 하는데 도저히 감당 못하게 무시무시해 보였거든. 그래서 엔터테이너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미연_네가 왜 못하니? 연극해도 잘할 거야.



고현정_내 졸업공연을 못 봐서 그래. <갈매기>의 마샤를 했는데, 처음 마샤가 등장해서 호롱불을 켜야 했어. 막은 올랐는데 스탭이 호롱만 놓고 불을 안 갖다놓은 거야. 그래서 망설이다 앞줄에 앉은 관객한테 “성냥 좀 주세요” 해서 호롱불을 켰어. (좌중 폭소) 그러니까 난 배우의 애드리브가 아니라 엔터테이너의 애드리브쪽으로 머리가 도는 거지. 배우라면 불이 안 밝혀졌어도 켜졌다고 상상하고 연기로 표현해야지, 어떻게 엄연한 무대와 관객 사이 경계를 터버리니? 이후로 연극은 못하겠어.



이미연_나는 순발력이 없어서 반대로 토크쇼 같은 건 못하겠어. 제의를 받으면 무지하게 자료 받고 다 읽어본 연후에 “이건 내가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아” 하고 접는 거야. (웃음)



고현정_반면 내 애드리브는 너무 위험하고. 감성 대비 공부가 부족해서 사고를 치는 거야.



이미연_너한테는 감성과 집중력을 포함해 많은 장점이 있지만 제일 부러운 건 좋은 의미에서 배우가 갖추어야 할 포커페이스야. 난 그게 안돼. 매니저가 뭘 잘못해서 방금 화를 냈다면 연기에 묻어나기 때문에 조금 사이를 뒀다가 촬영해야 해. 그런데 현정이 넌 그런 전환이 돼. 굉장히 머리가 좋은 배우야.



고현정_지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 더 해맑은 것 같지 않니?



이미연_(웃음) 내게 사람을 이미지화하는 습관이 있나봐. 그래서 때로는 네가 술 마시는 게 싫고 세게 이야기하는 것도 싫다? 원래부터 넌 솔직한 사람이었지만 혼자가 된 뒤에 세상에 강하게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괜찮냐고 묻지 마요. 난 괜찮으니까”라는 식으로 저러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 그 안에도 어떤 약함이 들어 있는 거잖아.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원래 아름다움이 너무 크다 보니까 그 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도 몰라.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쿨하게 꼭 안 그래도 되잖니.



고현정_진심으로 와닿는 말이야. 굉장한 순간이다. 우리 약속해서 만나도 그냥 추억담 나누고 헤어지는 게 다였는데. 진짜 행복하다. 미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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