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현정, 배두나] “나 역시 대중이니까”
출처 cine21 (글 : 김혜리 | 사진 : 손홍주 | 2012-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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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이 배두나를 인터뷰하다



영화 <코리아>의 에필로그에 스치는 탁구 남북단일팀의 리분희 선수와 현정화 선수의 실제 사진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헤어질 시각이 다가왔을 무렵 촬영된 것으로 짐작되는 사진 속에서 리분희 선수는 석별의 정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현정화 선수는 예의 피노키오 같은 콧날과 나란한 각도로 시선만 가만히 떨구고 있었다. 리분희 선수로 분한 배우 배두나를 닮은 쪽은 도리어 현정화 선수였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인 리분희 선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배두나의 분신이다. 반드시 해야 할 말만, 그중에서도 거두절미한 몸통만 뚝뚝한 말씨에 실어 쓱 내미는 <코리아>의 리분희를 보고 있으면 배두나가 왜 그녀를 해석하고 체화하겠다고 의욕을 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몇 차례 인터뷰에서 만나본 배두나는 알고 느끼는 바를 쏟아내기보다 머금고 있는 사람이고 특히 본인의 어려움이 화제가 될 때면 말이 더욱 짧아지는 드문 여자다. 대화 끝에 슬픔과 조바심이 치밀어도, 그것들은 용케도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만 소용돌이친다. 그래서 이에 감응한 인터뷰어가 이유도 모른 채 먼저 글썽이는 낭패를 겪곤 한다(이 난처한 순간은 고현정과의 이날 대화에서도 종종 찾아왔다). 연기의 특징도 상통한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 예술가들에게 미니멀리즘이란 뭔가를 덜 하는 작업이 아니라 가장 많이 덜어내는 인고의 작업인데, 배두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해치워버리는 몸을 가진 배우다.



무조건적 ‘스킨십’이 우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고현정과 배두나는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친분이 널리 공개된 적이 없어도 멀찌감치서 믿거라 하는 사이다. 정직한 톤은 공유하면서도 색채와 질감은 딴판인 서로의 연기를 챙겨보는 일도 두 배우의 즐거움이다. 드문드문 박혀 있는 몇몇 진한 교감의 기억은 이 느슨한 관계의 거멀못이다. 고현정이 동료 배두나에게서 보는 매력을 표현하느라 쓴 서너 가지 표현은 “한결같다”로 수렴한다. 그것은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지루한 일관성이 아니라 반대로 배우로서 정주하지 않고 계속 정직하게 모색하는 태도의 여일함에 대한 감탄이며, 13년간 일일극부터 외국영화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한 작업 환경 속에서도 놀랄 만큼 닳아지지 않는 배두나 특유의 아우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1991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울며) 일일이 지켜봤다는 고현정은, 정작 인터뷰 시점까지 <코리아>를 관람하지 못했다. 조만간 극장을 찾을 그녀는 이번에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코리아>의 배두나는 심지를 보존한 채 숙성했다. 호기심으로 세계를 살피던 소녀의 눈동자는, 보살피는 눈빛까지 담게 되었다.



적당한 인력과 척력, 삼가는 마음이야말로 두 인간이 상대 주변에서 오래도록 공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라고 믿는 고현정에게, 예민하게 알아들으면서도 진중히 반응하는 배두나는 썩 어울리는 대화 상대였다. 영화에서 자주 그랬듯 배두나는 응시와 경청으로 위로했고, 고현정은 엄격히 말을 다듬어 생각의 핵심에 같이 닿고자 했다. 그저 경계(警戒)를 해제하기 위해 여자들이 쓰곤 하는 과장스럽게 다정한 제스처 없이도, 충분히 친밀(親密)한 오후. 과하게 달콤한 것이 있었다면 오직 두 배우가 들이켠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토뿐이었다



고현정_‘쪽’이 정규 코너가 된 뒤 여자 인터뷰이는 두나씨가 처음이네요. 궁금한 사람, 평소에 못 만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다보니 주로 남자, 그리고 음악인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배두나_(웃음) 저라도 가수가 더 궁금할 거예요. 배우는 작업하는 프로세스를 다 아니까.



고현정_내가 가진 배두나라는 배우의 인상은 우선,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웃음) 예를 들어 피차 형편 때문에 연락한 지 오래됐는데 일 때문에 서로가 필요해서 갑자기 찾는 일이 생기잖아. 이번에 이런 영화를 찍었으니 와서 보라거나, 내가 토크쇼를 하니 나와달라거나. 연예계에서는 대개 그렇게라도 연락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두나씨는 그게 잘 안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내 생각에도 진짜 친분은 “내 프로그램에 섭외하고 싶지만 실은 이런 장단점이 있다. 너도 필요하다면 모르지만 나와의 관계 때문에 무조건 응할 필요는 없다”는 내용까지 포함해서 연락하는 게 아닐까 싶고.



배두나_(끄덕이며) 사실 <코리아> VIP 시사회에 고현정 언니를 초대하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어요. 제가 연락드린 지 너무 오래돼 그럴 순 없을 것 같다고 했어요. 이슈가 되면 영화에는 좋겠지만 제게는 언니와의 개인적 관계도 귀하기 때문에 갑자기 그런 식으로 부탁드릴 수가 없었어요.



고현정_또 앞뒤가 맞는 사람이라는 것. 필모그래피도 다양하겠다, 변하려면 변할 소지가 참 많은데 한결같아요. 대중은 몰라도 같은 일 하는 사람끼리 감지하는 변화가 있잖아. 인터뷰의 미묘한 말투라든가 사진 찍히는 모습에서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두나씨의 그런 일관성은 어쩌다 일하는 상황이 모양새가 덜 만들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의 아우라와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그리고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란 것도 알아요. (웃음) 몇해 전에 두나씨가 시간을 오래 들여 찍는 카메라를 다루는 모습을 보고 내가 관심을 보였더니 카메라를 선물한 것도 모자라 직접 찾아와 설명까지 해줬잖아.



배두나_좋아하는 사람한테만 그래요. 하하. 그 카메라가 롤라이(Rollei)였나? 저야말로 언니처럼 못해요. 5년 전쯤인가 진짜 마음이 아플 때 언니한테 전화를 했어요. 워낙 어려서부터 팬인지라 어렵기도 하고 평소 귀찮게 해드리기 싫어서 자주 연락은 안 드렸는데 이성을 잃을 만큼 힘드니까 이성을 놓고 전화를 하게 되더라고요. 하하. 근데 언니가 딱 알더라? “너, 울려고 전화했지?” 그랬어요. 통화로는 세상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엄살이냐고 해놓곤, 전화 끊고 30분 뒤에 언니 매니저가 집으로 CD 한장을 들고 오셨어요. 음악 듣고 기분 풀라고. (웃음)




“힘들다고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고현정_배우로서 배두나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분명 외로울 텐데 외로운 티를 안 내고 힘든데 힘든 티를 안 내서예요. 힘들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도 없지만 필모그래피를 보면 굵직굵직한 행보만 봐도 힘들고 외로울 거라는 걸 다 알겠거든. 보통은 캐릭터 하나 어렵게 얻으면 웬만해선 그걸 도루묵 만드는 선택은 안 하잖아요? 일일극에서 주말극, 또 미니시리즈 거쳐서 봉준호 감독과 영화 찍기까지가 참 힘든 코스인데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기도 하고.



배두나_힘들다고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다들 힘들게 사니까. 나 정도면 가진 것에 비해 굉장히 축복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플란다스의 개>도 오디션장에서 졸고 있는 저를 보고 봉준호 감독님이 “얘가 현남이구나” 싶어서 캐스팅하셨는데 그거 하나로도 세상 고마워하며 살아야죠. 연기도 열심히 한 티내는 게 싫어요. 열연하면 배두나 연기 잘한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만 관객 입장에서 보면 배우가 연기는 잘하는데 그 캐릭터가 안 보일 때가 있잖아요. 저는 저대로 언니가 예능프로그램() 하신다는 소식 듣고 좋았어요. 누가 봐도 그즈음에 해야 하는 일을 하고 그게 수순이면 매력을 못 느끼는데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니까 멋있어 보여요.



고현정_<코리아>에 배두나씨가 출연한 느낌도 비슷해요. 영화를 아직 못 봐서 조심스럽지만, 선악이 분명하고 감동을 주고 보는 이를 단합시키는 영화일 거라는 인상을 주는 제목이잖아요? 언뜻 배두나라는 배우가 반드시 해야 할 영화였을까 의아하기도 하면서도 이런 유형의 영화가 가진 미덕과 오락성 외에도 배두나가 했다는 점 때문에 영화적으로도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관심이 생기는 거지.



배두나_리분희 역은 처음부터 저한테 들어온 게 아니라 많은 여배우들이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제가 필요하다고 고집하신 면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도 해볼 만한 부분이 있었고요. 처음 읽었을 때 첫 대사부터 이해가 안됐어요.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현정화 선수가 은메달, 리분희 선수가 동메달을 땄는데 시상대에 올라가면서 그녀가 괜히 한마디 던져요. “그렇게 죽을 거같이 치더니 은메달이가?” 왜 분희가 그런 말을 했지? 분명 죽일 듯 게임을 해놓고 그런 말을 던지면 대결구도도 깨지고 카리스마 없어 보이잖아? 그러다가 리분희는 다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깨달았어요. 적이고 우리 편이고를 초월해 다 품지만 표현은 안 하는 인물. 후배 순복 선수(한예리)한테는 “앞으로 해외경기 나가다보면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겠지만 눈에만 담고 마음엔 담지 말라” 하는 충고를 하는데 그걸 읽고 알았어요, 아아, 리분희 선수가 마음에 담았구나. 그런데 막상 찍으면서는 가끔 섭섭한 순간도 있었어요. 현정화와 리분희가 대화하는 신에서 지원 언니는 두번 만에 오케이가 나는데 나는 열두번을 가.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드신 거지. (웃음)



고현정_아마 처음에는 배두나라는 배우의 감수성이 좋아서 선택했지만, 이 영화에선 그게 아니라 좀더 진하게 해달라거나 다른 걸 바라게 되어서 오케이가 안 나는 거겠지. 이런 걸 못할 애인 줄 알면서 캐스팅해 놓고는 맞추려고 하는 면이 생긴다고 할까.



배두나_저도 좀 고집을 부렸어요. 열두번을 간 것 자체가 세 번째 테이크쯤에서 고쳐서 하려면 할 수 있었는데 고집한 거니까 나도 못됐죠. 하하. 전 스탭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영화를 찍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내가 열두번 NG를 내면 반사판 든 스탭 입에서 한숨이 새나와요. 나도 그 상황이 싫고 부끄럽고 그들에게 자부심 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데 안되니까 힘들어.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감독 정재은, 2001)를 찍을 때 느낀 게 있어요. 10여년 전에는 여성감독이 별로 없었고 거칠게 말하면 스탭들이 아주 순순히 감독을 따르진 않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고집으로 제압을 했어요. 의견이 안 맞으면 세 시간을 서로 버티면서 그 추운데 촬영을 안 하는 거야. (웃음) 그렇게 힘들게 찍었는데 영화가 잘 나오니까 스탭들이 그 감독님을 다 인정하는 거예요. 거기서 배워서 내가 지금은 힘들게 열두번을 가도 나중에 영화가 잘 나오면 수긍해주겠지라는 믿음 하나로 지탱했는데 외롭긴 하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동료 배우들도 현장에서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예를 들어 난 투숏에서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옆에서 튀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이 보여야 하니까. 그러다보니 내 연기가 전부 심심했나봐. 시사 뒤에 함께 촬영했던 배우들이 “배두나의 힘을 봤다”고 해서 “현장에서 그대로 하는 거 보셨잖아요?” 하니까 그땐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고현정_가만히 있는 연기가 더 힘들어. 뭐든 하는 게 더 편하지. 사람이니까 그날 하루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을 안고 개운하게 퇴근하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가 이야기하는 동안 뭘 그리 많은 표현을 하겠어요? 제3자 시각에서 보면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걸 냉정히 판단해서 카메라와 스탭들 다 있는 현장에서도 견지하는 배우는 보기 드물어요. 현장에서 열심히 하면 적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타협하는 내 자신이 싫을 때가 있어. 열심히 하는 게 뭐가 중요해요.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지.



고현정_두나씨 작품은 볼 때마다 의외예요. <린다 린다 린다>와 <공기인형>을 보고는 그런 쪽으로 갈 거 같았는데 드라마 <공부의 신>과 <글로리아>를 했죠. 베를린에서 워쇼스키 감독과 영화(<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는다더니 남북한 탁구영화를 찍었잖아.



배두나_실은 그동안 제가 마음이 좀 힘들었어요. <괴물> 이전부터 내가 영화계와도, 대중과도 잘 안 맞는다는 고민을 했어요.



고현정_배두나가 이러리라고 누가 알겠어요?



배두나_<괴물>은 성공했지만 그건 제가 흥행을 했다기보다 줄을 잘 선 것이고(웃음), 드라마를 하면 대중과 소통이 잘되는데 영화는 좋은 감독님들이 노출 연기를 원하시면 노출 연기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는데도 투자자가 꺼리는 배우가 되고 흥행 참패 딱지가 돌아오니 참 싫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영화는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연기를 안 하면 감이 죽을 테니 연기는 해야겠다고 판단한 시기가 있었어요. 그즈음 <공부의 신> <글로리아>(이상 2010)를 했죠.



고현정_<글로리아>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몰라. 거기서 두나씨가 연기한 인물이 지고지순한 역도 아니고 무대에서 노래도 부르고 온갖 걸 다 하는데, 드라마 현장은 사실 좌판 펼치듯 벌여놓고 갑자기 연기를 해야 하는 민망한 경우도 많고 연기의 뚜렷한 명분을 세워주거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상황이 아닐 때가 많은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영화만 하던 친구가 어떨까, 톤이 다 다른 연기자들과 한꺼번에 주고받으면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상상하며 봤죠.



배두나_장르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작 상황이 빡빡하다보니 드라마를 할 때는 공들이지 못하고 일상적으로 찍게 되는 상황이 힘들었어요. 걸어야 하는 신도 서서 찍자고 하고. 야외촬영이 자꾸 없어지기에 왜냐고 물었더니 배우들이 야외를 싫어하고 세트도 하루로 몰아주는 걸 선호한대요. 그래서 그럼 나라도 하겠다고 상대역 배우와 미친 듯이 찍은 기억이 나요. (웃음) 내가 열정을 보인다고 다 받아줄 만큼 세상이 녹록한 것이 아닌데 매번 같은 걸 느끼고 화내기를 반복하는 제가 바보스럽기도 하죠.





고현정_혹시 주변에서 지칠 만도 한데 매번 같은 대목에서 화를 낸다고 하지 않아? (웃음) 어쩌면 현장에서 여배우한테 사람들이 바라는 건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평소 촬영장에서 자리 양보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도 나중에 보면 내게 원하는 것이 그게 아니었나 싶을 때가 있으니까.



배두나_어느 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내가 인간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못되게 굴고 건방져도 같이 일한 사람들한테 내가 저 사람이랑 일했다는 자부심 비슷한 걸 주는 게 더 좋은 건가? 조금 더 도도하게 있어주고 ‘여배우틱’하게 굴어야 나 저 배우랑 일했다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걸까.



고현정_촬영하는 100일 동안 어리광부리고 폐를 끼쳤어도 VIP 시사나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옆에 앉아 있을 때 상냥하게 구는 걸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 왜냐하면 그건 다수가 보니까. 대중이 보지 않는 시간에 아무리 존중해도, 만천하가 보는 시사회에서 활짝 웃어주지 않으면 결국은 “저 애는 제 스타일대로만 일하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배두나_여배우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투자사나 제작사 윗분들이 현장에 오는 날엔 정중히 인사한 다음 막내 스탭들과 가서 어울리는데 저 같은 사람은 사회생활하기 힘들겠죠.



고현정_응, 해보니까 힘들더라, 두나야. (웃음) 하지 마. 너만 다쳐. 높은 사람들이야 나중에라도 함께할 자리가 있을 테고, 현장에는 당장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몰라라 하고 그늘에서 높은 사람들과 한담 나누는 건 안 내킬뿐더러 영화 전체에 도움도 안되는 거라고 생각해. 근데 어떨 때는 다 소용없어요.



배두나_하하. 차라리 제작사나 투자사 분들에게 싹싹하게 굴어 야식 하나를 더 얻어오는 게 나은?



고현정_오히려 그런 영리함을 원하더라고. 진상을 한번 부려서 좀 촬영을 일찍 접든가. (웃음)



배두나_저, 쓰러져달라는 말 진짜 많이 들었어요. 우하하.



고현정_강인한 체력, 이런 걸 별로 원하지 않아요. 몇시에 촬영이라고 해서 당연히 시각 엄수했는데 나중에 회식자리에서 들어보면 그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늘 늦는 사람하고 별로 달리 보지 않는구나 싶으면 왜 내가 그리 열심히 서둘렀나 싶지.



배두나_그렇지만 <코리아> 하면서도 느꼈지만 아는 사람은 알아주잖아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직 힘이 없다는 거지. 그분들에게 힘이 생길 때가 오겠죠?



고현정_언제 생길까? 엉뚱한 곳에 물 떠놓고 제 지내는 기분이야. (좌중 폭소) 그러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연예인스럽게 구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기도 해. 예를 들어 분장실에선 집중하고 싶으니 조심해서 들어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할 경우, 그쪽에서 필요할 때 마구 들어오다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돌려보내면 백발백중 화살이 날아와. 그럴 거면 처음부터 분장실은 아예 오지 말아달라고 딱 잘라 양해를 구해두는 쪽이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지. 어쩌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같은 배우가 오히려 헷갈리는 애인가봐.



배두나_그럴 수 있죠. 기본은 서로 매너를 지키는 선에서 털털하게 마음을 나누자는 건데 막상 털털하게 하면 선을 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제가 “아, 그건 저 오케이 아니에요” 하면 실망하고.



고현정_그런 일 있지 않니? 세상에 알려진 내용, 자기가 접한 정보만 취합해서 내가 이런 사람일 거다 상을 그려놓고 같이 일을 하는 입장이 돼서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면은 이런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어머, 저를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하는 리액션을 안 해줬다고 무안해하고 토라지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나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충 리액션을 할 수는 없잖아? 특히 작업을 같이 한 사람이 오해하면 그 오해가 막 퍼질 테니까. 그런 일에 마음 상하는 건 본인들이 평생 약자라고 여겨서인데, 어떤 사안을 놓고 의견을 말하는데 약자, 강자가 어디 있어. 연예계에서 계약하거나 할 때 편의상 연예인에게 얼마짜리다 매기는 비즈니스적 가치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때도 갖다대는 셈이잖아.



배두나_일하다보면 사람들이 이쪽에서 건드리지 않았는데 먼저 방어를 해서 답답하곤 해요. 접점이 이쯤이라면 (손으로 그 점을 뛰어넘어) 항상 여기까지 넘어온 다음에 내가 그건 못하겠다고 해서 접점까지 다시 후퇴하는 수순에 익숙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이쪽 업계에서는 본인이 먼저 세게 나가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손해볼 거라고 예측하고 먼저 치고 들어와 상처 주는 경우를 많이 봐요.



고현정_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가면 안 불안할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3명을 만나건 300명을 만나건 3천명 대중을 만나건 웬만해선 중심을 잃지 말자고 마음을 먹어. 그런데 예를 들어 무슨 행사에 갔다고 쳐. 거기서 아는 사람들이 인사하면 오랜만이니까 “어, 아무개야 안녕?”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표정) 하고 솔직히 반가워해요. 그러면 그 얼굴이 다 ‘굴욕사진’으로 나와요.



배두나_푸하하. 언니도 그런 거 신경써요?



고현정_원래 신경 안 썼는데 결국은 그것만 남더라고? (좌중 폭소) 그래서 이래선 안되겠다, 더이상 기 빨리지 말자 맘먹고 약간 가식적으로 행동한 날은 또 무난하게 넘어가요. 그런데 그런 날은 집에 오면서 마음이 불편한 거야. “아까 그 친구를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데 그도 이제 나를 사석에선 살갑게 굴다가 남들 앞에서는 우아하게 고개 까닥하는 사람들 축에 넣겠구나.” 결론적으로 굴욕사진 많이 찍힌 날이 집에 돌아와서 덜 허전하더라고. 어떻게 할지 항상 기로에 서 있는 거지. 그럴 때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자문을 해. 넌 왜 컴백을 했지? 왜 다시 이곳에 나왔어? 여기 나온 이상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있겠지? 그게 뭘까? A, B, C는 감수하자. 그런데 D,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몸짓과 뗄 수 없는 언어



고현정_<코리아>에서 북한 사투리 연기는 어떻게 했어요?



배두나_음… 근데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사투리 연기가 힘들지만 달리 보면 기대서 가는 구석도 있지 않나요? 사람들이 나보고 탁구선수, 양궁선수, 인형, 부산 사투리, 영어, 일어, 수화 왜 이런 힘든 것만 하냐고 묻는데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을 생짜로 연기하는 게 훨씬 힘들잖아요. 탁구선수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게 좀더 편안해요.



고현정_어디 나갈 때 의상 하나 챙겨주는 거죠. 진짜 배우다운 말이다.



배두나_그래서 난 오히려 너무 쉽게 캐릭터에 기대서 가려고 하는 거 아닌가 자책해요. 사람들 생각이랑 반대인 거죠. 양궁에 기대고 탁구에 기대고 북한 말에 기대는 게 부끄러워요.



고현정_모 아니면 도죠. 그걸 잘하면 의지할 수 있지만, 잘 못하면 깨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 사투리가 처음엔 어색하게 들려도 20분쯤 지나면 그냥 적응해서 보기도 하지 않나?



배두나_그런데 또 욕심은 많아서 완벽하게 하고 싶어요. 일본어 연기할 때도 그랬고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는 영어 연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듣고 웃는 건 싫은 거예요. 한국계 복제인간 역이라 유창할 필요는 없지만 영국식 영어를 새로 배웠죠.



고현정_두나씨는 모험하다가 끝날 것 같아. (웃음)



배두나_으아아, 나 시집은 언제 가?



고현정_어, 결혼 생각 있어요?



배두나_언니, 왜 갑자기 MC를 봐요. (웃음) 결혼은 남들 다 하는데 한번 해봐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나는 딸이 갖고 싶어요.



고현정_영국식 영어는 악센트를 새로 익힌 건가요?



배두나_<클라우드 아틀라스> 배우들은 영국 출신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는 휴 그랜트처럼 옥스퍼드 잉글리시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랑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전부 런던 사투리, 코크니 악센트를 써서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저로선 (멍하니 느릿느릿) “뭐-라-고?” 계속 반문할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배우고 싶어졌어요. 제가 느낀 건 일본어도 영어도 특유의 애티튜드를 알아야 말이 나온다는 거였어요. 영어로 말할 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어깨가 움직이고(어깨 제스처), 일어를 할 때는 이렇게(상냥하게 목례를 반복한다) 해야 말이 나오더라고.



고현정_다 해보고 나니 서울말의 태도는 무엇인 것 같아요? 나는 영어도 일어도 못하지만 추임새는 물론이고 발성법도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은 받았거든요.



배두나_서울말 할 때 목소리가 제일 낮아져요. 가장 편하고 자신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제일 밑에 있는 발성이 나오는 거죠. 자신이 없는 외국어나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 몸이 움직이는 것과 반대로.



고현정_나는 요즘 꽂힌 북한 말이 있는데. “이리 오라” 이런 말, 웃기지 않아? 사실 다정한 표현인데…. (웃음)



배두나_<코리아>에서도 후배한테 기를 북돋워준다고 “긴장하지 말라” 그래요. 이게 뭐 따뜻한 건지 만 건지? 푸하하. 그러면서 되게 멋있어.



고현정_단 음식이 몸에 안 좋듯이 상냥한 말과 달리 툭툭 건드리는데 어딘가 변치 않을 거 같은?



배두나_음, 그러고 보면 언니는 북한 말 같은 사람이에요. 이게 말이 되나? 하하. 예전에 내가 박찬욱 감독님이 내 연극을 엄청 혹평했다고 언니한테 투정 부린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언니가 날 위로하지 않고 따끔히 충고해줬는데 그때부터 언니한테 기대게 됐어요. 아니 아니, 상처 준 건 아니고요. 언니가 “아유, 두나야, 그랬구나” 받아줬으면 못 기댔을 것 같아요.



고현정_박찬욱 감독님은 너랑 함께 작품을 하신 분인데 내가 감히 그분보다 너를 더 위한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남들이 못 본 구석을 찾아 칭찬하면서 편승해가는 건, 나쁜 이야기를 해주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거든.



배두나_언니가 그때 날 딱 잡아주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 원래 가슴에 비수 꽂는 말 잘해요. 하하.



고현정_그래? 아니, 왜 그러신대? 난 또 아닌 줄 알고 그랬지. (좌중 웃음)



배두나_이쪽 일이 도마 위에 오르는 직업이다 보니 우리 주변 사람들은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할 거예요.



고현정_그러니까 이율배반적이야. 도마 위에 오를 때는 난도질당하려고 올라간 건데 막상 난도질당하면 막 아프다고 하잖아. 그게 싫으면 아예 도마 위에 올라가지 말아야지. 그러니까 내가 도마에 오를 때도 그렇지만 남이 도마 위에 올라갈 때도 책임감있게 난도질을 해줘야 해.



배두나_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현정_어설픈 난도질을 하면 피도 못 흘려보고 괜히 조그만 상처 갖고 내가 이런 칼도 맞아봤네, 그런 도마에도 올라봤네 내용 없는 전적(戰績)만 생기는 거지. 게임의 질이나 집중도는 없이.



배두나_와 오늘 나, 깨닫는 게 있는 것 같아. 지금까지 한번도 내가 도마 위에 자진해서 올라갔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고현정_(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가 자진해서 올라간 거야, 두나야. (좌중 폭소) 저 도마엔 나만 올라가겠다고 보채기도 하고. 붕장어는 싫다고, 광어가 되겠다고 하기도 하고.



배두나_명쾌해진다. 하하.



고현정_우리가 귀족처럼 가만히 있고 싶은데 억지로 이 세계에 끌려와서 마지못해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 할 때는 하는 거야. 아까 우리가 말한 불만은 그렇게 일하는 와중에도 납득할 수 없는 관행이 있다는 거였고.



배두나_그래서 힘들다는 말을 못하겠어요. 사람들이 고되겠다고 걱정해줄 때 “이 직업이 원래 힘들어요”라고 덤덤히 대답하면 참 성의없어 보이는데 사실 더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그만큼 대가를 받잖아요?





배두나_일하면서 최근 속상했던 건, 사람들이 그동안 일해온 방식에 지나치게 맞춰 살려고 한다는 점이었어요. 이게 정석이고 이게 대중적이니까 맞춰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대중예술인이라면 반 발짝은 앞에서 끌어가야 하지 않나요? 영화 관객도 그동안 수준이 많이 올랐는데 요즘은 기준이 여기라면 그 조금 뒤에서 안전하게만 가려는 경우를 많이 봐요.



고현정_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불안한 지점에 나를 갖다놓지 않으려면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안정되고 뻔한 걸 하려면 왜 이 직업을 택한 건지.



배두나_<공기인형>에 오다기리 조가 딱 두 장면 나오거든요. 그 나라의 톱스타가 두 신에 나와서 엄청 연기를 잘하는 거예요. 분량이나 비중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는 거죠. 전 그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서 언젠가는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킹스 스피치>의 헬레나 본햄 카터. 왕의 아내로 평범하게 나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존재감이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과거엔 미모의 톱스타였던 그녀가 그동안 팀 버튼 영화에서 기괴한 분장하고 극단적인 쪽으로 가더니 홀연 “아니야, 나 사실 기본기도 굉장히 잘해”라고 슬쩍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고현정_멋있지. 두나야, 그런 게 멋있는 거지.





배두나_나는 쥐뿔도 없는 배우고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한물갔나보다 소리나 들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길로 가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고현정_우리가 어떤 활동이나 작품을 할 때 즉각 반응하는 분들이 대중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어. 내가 어디 가서 배두나와 아는 사이라고 표는 안 내도 마음 깊이 믿고 어려울 때 힘이 돼주고 싶듯, 더 조용하고 점잖은 대중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해. 왜냐하면 나 역시 대중이니까. 내가 지금 예능프로그램을 하는 것도, 그때그때 소리를 내지 않아도 본인의 생활을 묵묵히 하면서 끝없이 에너지를 주는 그분들을 믿고 하는 선택인 거지. 두나씨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척하려는 겉멋이 아니라 숙고와 경험 끝에 나온 행동이라는 걸 아는 분들이 두텁게 존재한다는 거죠. 사실 그런 안목을 가진 배우 한명이 길러지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삶을 거는 직업이란 표현까지 하기는 거창하지만 ‘투영’이란 단어로는 좀 부족할 정도로, 배우는 자기 상태가 다 나타나는 일이니까.



배두나_모든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얼굴에 보이지만 배우는 클로즈업이 여기까지 들어오고 스크린은 엄청나게 크니까요. 이따금 케이블에서 십수년 전 드라마를 방영하는 데 거기서 참 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연기자가 요즘은 탁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놀랄 때가 있어요.



고현정_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배우는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삶의 집중도를 올려야 한다고 느껴. 취향 아닌 일까지 일부러 할 건 없지만 문화생활이든 인간관계든 일상도 연기하는 시간만큼 치열하게 해야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 여배우의 일은 한쪽에 치중된 면이 있어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편협한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자기 삶은 엉망인데 영화에서는 뛰어난 연기를 하기도 어렵고, 설령 그게 된다 해도 역시 발칙한 일 아닐까. 신인일 때는 서툰 대신 순수함이 있다면, 연차가 쌓이면 능란함을 얻고 대신 순수를 잃을 텐데 그건 세상 탓도 아니고 남 탓도 아니야. 내가 물들 시간이 있었으면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물을 뺄 시간도 있었을 거라는 거지. 그걸 못한 건 게을러서, 아늑하고 편치 않은 데를 피해서인 거예요. 그렇게 자기랑 밀착된 직업이니까 선배나 배우 아닌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연기 조언도 걸러서 들어야 하는 것 같아. 나 같은 또라이는 걸러 듣고 감독님한테 반문도 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하는 친구들은 하라는 대로 하기 쉽거든. 그건 위험할 수도 있어.



배두나_전 20대 때는 시키면 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지키게 됐어요. 일을 하다보면 촬영이 원치 않는 분위기로 흘러갈 때도 있고 내 열의가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니 나를 지키고 캐릭터를 지켜야겠다는 정서가 생기더라고요. 건방진 말이기도 해요. 영화는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니까 눈에 힘을 더 주라면 주는 게 맞겠죠. (웃음)



고현정_두나씨가 영화를 찍고 개봉하는 중에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도 자기를 지키는 일이죠.



배두나_이번에 런던에서 영어 공부한다는 계획은 엄마를 포함해 다들 반대했어요. 비행기값이 얼만데…. 내가 나를 믿긴 하지만 혼자 억지부리는 것 같고, 누가 도전해보라고 밀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배운 말이 제대로 안 나오면 내가 여기 왜 와 있나 밤에 괴로워하다가 이튿날 또 일어나서 레슨 받고. 하지만 그냥 해요. 카메라에 빠져 수집하고 사진 배울 때도 다들 사치스럽다고 했지만 결국은 모델, 배우 일에 도움이 됐어요. 포토그래퍼가 와이드로 당기는지 망원으로 찍는지 알게 되니까요. 예컨대 망원으로 당기는 클로즈업이니까 손을 더 올려야겠구나 하는 식으로. 동영상 편집도 배우고 나니 연기의 호흡에 참고가 됐어요.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더라고요.



고현정_부러워요. 내 연기는 편집점이 안 보인대요. 난 그냥 막하고 있는 거야. (좌중 폭소)



배두나_그런데 언니는 그게 너무 매력이에요!



고현정_그래, 그걸 그냥 내 매력으로 하려고. (웃음)



배두나_창피해서 영어 공부한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코리아> 개봉으로 매체 50여곳과 인터뷰를 하는데 이야기가 그리로 흘러가니 거짓말은 못하겠더라고요. 언어는 재미로 배우는 게 아니라 공부는 힘든데 날 표현하는 도구로서 배우는 거예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으면서 너무 답답했거든요. 원래 나는 훨씬 괜찮은 사람 같은데 영어만 하면 너무 바보 같은 거예요! (좌중 폭소) 심지어 사람들 붙들고 말했다니까? 나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교양있다고. 우하하. 연기야 대사가 있으니 그럴듯하게 할 수 있지만 거기서 대사가 없는 일상을 몇달을 사는데 배고파 배불러만 하고 살 순 없잖아. 감독님이랑 철학적인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웃음) 그걸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차마 베를린에서 곧장 한국으로 올 수가 없었어요.



고현정_이런 이야기를 좀 편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어째 이런 말하면 “나중에 네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보자”라는 반응이 많아서 무서워요. 뭘 자꾸 두고봐. 우리가 남한테 보여주려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세상은 못 바꾼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말해요. 내가 지금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틀리거나 아주 나쁜 게 아니라면 솔직한 내 모습 그대로 일하고 싶은 거다. 그러니까 이런 나를 원치 않으면 쓰지 마세요.



배두나_흐흐, 귀여워….



고현정의 선물


to . 배두나

“두나가 좀… 시(詩) 같지 않아요?”
선물에 실린 뜻을 좀더 캐물을 생각이었는데 한마디로 그만 납득해버렸다. 색색 장정의 시인선집을 통째로 들고 온 고현정은 배두나를 감정이 응축된 시어에 비했다. 간결하고 밀도 높은, 그래서 구구한 설명이 스스로 낯을 붉히게 만드는. 선집 중에서도 고현정이 특히 좋아한다고 덧붙인 장석남, 조인호 시인의 책을 뒤적이던 배두나가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잘 안 보고 듣는 거, 읽는 거 좋아해요. 직접 그림을 보여주는 건 별로인데 이상하게도 음악도 그림이 그려지는 음악이 좋고 책도 이미지가 떠오르는 책이 좋아요.” 얼추 과녁을 맞힌 선물인 듯하다. 비행기 여행에 가져갈지 몰라 아담한 판형을 골랐다는 고현정의 말을 듣고 있자니, 배두나가 이 색종이 같은 시집들로 학을 접어 날리는 환상이 떠올라 흐뭇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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