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황정민] 안 하면 미칠 것 같은, 좋아서 하는 일
출처 cine21 (글 : 윤혜지 | 사진 : 최성열 | 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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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산이다. 앞의 산이 고생을 비유한 표현이라면, 뒤의 산은 진짜 산(山)이다. 올해 황정민은 누구보다도 바삐 살았다. 지난해 말 개봉한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2014)이 올해 초까지 기세를 거두지 않았고, 그때 황정민은 <곡성>(감독 나홍진)과 <히말라야>(감독 이석훈)를 촬영 중이었다. <히말라야> 크랭크업 직후 5월부터는 <검사외전>(감독 이일형) 촬영을 시작했다. <검사외전> 촬영 중 한여름에 개봉한 <베테랑>(감독 류승완)은 가을까지 흥행세를 이어갔고, 9월 <검사외전> 촬영을 마치자마자 <아수라>(감독 김성수)가 바로 촬영을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은 12월16일 <히말라야> 개봉과 더불어 12월18일 공연을 시작하는 뮤지컬 <오케피>의 연출과 주역까지 책임지고 있다.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황정민을 잠시 붙들고 숨 좀 돌리자 했다. 그 김에 그간 꼭꼭 숨겨져 있던 <히말라야> 현장에 관해서도 내처 물었다. 빠른 속도로 작품 속을 질주해온 황정민은 히말라야의 압도적인 기운에 잠시 발을 멈추고 스스로 어떤 변화를 겪어낸 것도 같았다.



-뮤지컬 연습 중에 잠시 시간을 낸 거라 들었다. 지금도 영혼의 반쯤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올라 있는 것 같다(황정민이 지휘자 역할로 출연하는 <오케피>의 주무대가 오케스트라 피트다).



=얼른 <오케피> 올리고 조금 쉬고 싶다. (웃음) <어쌔신>(2012) 이후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뮤지컬 연출작이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들 하잖나. 배우를 빛나게 하기 위해 모두 마음을 합쳐 노력하는 거고. 내가 배우여서인지 그런 점에서 영화와 다른 쾌감을 느낀다. 뮤지컬이라 하면 보통 화려한 쇼를 먼저 떠올리는데 연극에 가까운 뮤지컬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다. 일본 작품이지만 전세계 어디에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있잖나. 보편적인 얘기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말라야> 얘길 해보자. JK필름에서 제작한 영화이고 황정민 원톱 주연이라는 데서 <국제시장>이 연상된다. 시대가 인물을 호명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던 <국제시장>과 산이라는 거대한 힘에 이끌리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히말라야>의 정서가 닮았다고도 느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나약하고 단순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 안에서 주어진 과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이 결국 다 우리네 삶의 일부가 아니겠나. 대사 중 그런 말이 있다. “산에 올라가면 뭐 대단한 걸 찾을 것 같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건 나도 몰랐던 내 자신입니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과연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일상에선 죽음이 그다지 와닿지 않지만 그곳은 항상 죽음과 직면해 있다. 산에서의 삶과 죽음은 어떻게 잘 살아야지, 어떻게 잘 죽어야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하다 조난으로 사망한 후배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거두고자 엄홍길 대장이 휴먼원정대를 꾸려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다.



=가상이 생생한 실제를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엄홍길 대장님이 아니다. <히말라야>는 영화다. 실화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거다. 물론 실제 있었던 일들이 ‘많이 담긴’ 영화란 데에 부담이 없진 않다.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던 <너는 내 운명>(2005)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단순하게 받아들였을 거다. <너는 내 운명>을 한 이후 영화로서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알았다. 실화에 바탕했기 때문에 내가 잘해내야 하는 게 있다면, 가령 ’산쟁이’들의 행동방식이나 습관 같은 걸 몸에 익은 듯 잘 연기하는 일일 거다.



-<너는 내 운명>이 상당 부분 창조된 이야기였으니 사실상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처음이다. 각기 달랐어도 그동안의 인물들이 어느 정도 ‘황정민스러운’ 캐릭터들이었는데 <히말라야>의 엄홍길 대장은 극적인 위트와 설정이 많이 빠진 인물이다. 직접 행동하는 캐릭터이기보다 안으로 고뇌하는 인물이고.



=그래서 처음엔 잘 안 잡히다가 촬영 중 어느 순간부터 황정민과 엄홍길이 중첩되는 지점이 생겨났다. 돌아보면 언제부터인가 나도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 연기 잘한단 말을 듣는 일도 늘어나고, 선배가 되었다. 좋은 점도 있지만 굉장히 외롭기도 했다. 아무도 날 편하게 부르지 않으니까. 후배 스탭과 일할 때면 “선배님이 오케이하시면 저도 오케이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더 얻고 싶고, 듣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히말라야>를 찍으면서 그 위치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엄홍길, 저 사람 참 외로웠겠다 싶더라. 실제로 대장님이 나한테 ‘외로웠다’ 이런 말씀 하시겠나. 절대 안 하신다. 아무도 그 속을 모른다. 저 위대한 분의 속을 우리가 얼마나 짐작할 수 있겠나. 듣지 않았어도 ‘저분 나랑 비슷하구나’ 막연히 알게 되는 거다.



-엄홍길 대장을 “더 알고 싶어서 술도 함께 자주 마셨다”고 했다.



=그랬다. 현장에선 “기!”를 계속 외치고 다니셨다. 처음 뵀을 땐 대단하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점점 보니 측은하고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참 이상하잖나.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나. 그런데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도 어려서 연극 시작하겠다 했을 때 집에서 얼마나 반대를 했는데. (웃음) 그런 감정은 조목조목 말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안 하면 미칠 것 같은데 어떡해.



-다른 레퍼런스도 있었나.



=산악소설 중에 재밌는 책이 참 많다. 심산 작가가 쓴 <엄홍길의 약속>(이레 펴냄)이란 책이 있다. 초반에 열심히 읽다가 점점 거기 얽매이는 것 같아서 읽기를 그만두었다. 촬영을 반 정도 진행했을 때 영월에 있었는데 갑자기 그 책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읽고 나서 굉장히 많이 울었고, 크게 반성했다. 사람을 향해 간다는 데에서 새삼 뒤통수를 쳐오는 감정이 있었다. 산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사람임을, 관계임을 알려준 거다. 이건 감정적인 얘기였고, 촬영하는 데 있어선 레퍼런스랄 것이 없었다. 산악영화가 <빙우>(2003) 이후 12년 만에 나온 거니까.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성취감보단 의무감이 앞섰다. <히말라야>가 잘해내야 이다음에 다른 산악영화도 나올 테니 좋은 교두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한정된 공간에 길도 하나뿐이고 같은 등산복 입고 나오고 행동도 거기서 거기일 테니 아무리 다르게 찍으려 한들 앵글이 늘 그게 그거였다. 달라 보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뭐가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다. (웃음)




-히말라야와 프랑스 몽블랑에 가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산을 마주하니 내가 인간인 것이 참 초라하더라. 자연 앞에 깝죽대봐야 별것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웃음) 그런데 또 얄궂은 게 며칠 지나면 그런 신기함도 줄고 그저 집 앞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오르다보니 산도 ‘오늘은 좀더 올라갈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하느님이 보우하셨기 때문이다. 거긴 오후 2시까지만 날씨가 좋다. 그 이후론 구름이 엄청나게 몰려서 촬영도 못한다. 네팔에 도착해서 경비행기를 타고 40분간 더 들어가야 되는데 비행기도 날씨가 나쁘면 뜨질 않는다. 예약제도 아니고 시외버스터미널같이 생긴 데서 줄 서서 타야 한다. 나와 촬영감독이 먼저 1진으로 가게 됐는데 그날은 우리가 탄 비행기 딱 한대만 떴다. 우린 몸만 도착했고 짐이고 뭐고 하나도 안 오고. 그냥 하룻밤 그 동네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로케이션에 주어진 시간이 일주일인데 산에 오르는 데만 3일이 걸린다. 촬영하기 무척 빠듯한 시간이다. 운이 좋아서 그 뒤엔 우리 60명 인원이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석훈 감독과는 어떤 얘기들을 했나. <댄싱퀸>(2012)에 이어 두 번째 만난 거라 호흡 맞추기도 수월했겠다.



=감독님은 예전과 똑같다. 사람은 변하면 안 된다. (웃음) 이석훈 감독님이 워낙 말이 없으셔서 내심 나는 <댄싱퀸> 초반에 진짜 힘들었다. 같이 술도 마셔보고, 싸워도 보다가 겨우 친해진 거다. (웃음) 그래서 말 안 해도 서로 어떤 상태인지 아니까 이번엔 정말 편했다. 그런 게 신뢰인 거 같다. 서로 기다리고 몰아붙일 타이밍을 안다. ‘중첩되는 지점’이 생기기 전에 찜찜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때는 캐릭터에 대해 얘길 많이 나눴다.



-등산 취미가 생기진 않았나.



=원래도 싫어했지만 집에 있는 등산복까지 다 찢어버렸다.



-영화가 어떻게 나왔을지는 궁금하겠다.



=그렇긴 한데 나는 편집본은 잘 안 본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깔끔하게 만들어져서 나온 걸 보는 게 좋다. 내 영화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영화보는 기분이지. (웃음)



-쉬고 싶다고 했지만 차기작이 <검사외전> <아수라> <군함도> 세편이나 된다. 곧 뮤지컬도 올릴 테고.



=<검사외전>에선 처음으로 검사 역을 맡았는데 인물 자체는 익숙한 캐릭터다. 사기꾼으로 나오는 강동원씨의 변화가 더 재밌을 거다. 투숏이 꽤 괜찮은 것 같다. (웃음) <군함도>는 아직 초고만 봤다. <베테랑>보다도 먼저 얘기하던 영화다. 나는 여자 밝히는 악단장을 연기하는데, 일본에 있는 여인을 잘못 건드려서 도망치던 중 어쩌다 군함도로 끌려가게 된다. 배경과 역사가 주는 무게감은 있지만 영화의 분위기 자체가 심각한 톤은 아닐 거다.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동안 우린 뭐하고 있었나. 그저 재현이 아닌 현재 시각에서의 해석이 될 거다. 지금의 눈으로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많은 얘기가 오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뒤에 생각해둔 건 아직 없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취미인 클라리넷 연주도 쉬고 있어서 근질근질하다. 연주를 쉰 게 몇달째라 얼른 다시 하고 싶다. 하루에 다만 30분이라도 꾸준히 불고 싶은데 그럴 정신조차 없다. 그래도 성격상 코앞에 닥친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당장은 <히말라야> 홍보와 <오케피>에 집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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