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황정민] 감독 최동훈이 만난 배우 황정민
출처 cine21 (글 : 이성욱 | 사진 : 오계욱 | 200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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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최동훈이 만난 배우 황정민

“생동하는 영화를 위한 히든카드”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는 수많은 남자를 상대로 ‘의리없는 전쟁’을 벌이지만 유독 도드라진 잔상을 남기는 장면이 경쟁 조직의 중간 보스 백 사장과의 대결이다. 띄엄띄엄 등장하는 ‘특별출연’임에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건 백 사장이란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기도 하지만 그 겉옷의 알맹이가 배우 황정민인 이유가 더 크다. ‘어? 황정민이란 배우가 저랬나?’ 싶을 정도로 그는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새겨져 있던 이미지를 깨끗하게 뒤집는다.



<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드러머 강수와 <YMCA야구단>(2002)의 광태가 초기 이미지를 만든 탓도 있을 것이다. 순박하고 어리숙한 캐릭터. 황정민은 캐릭터와 자연인 황정민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착한 연기’를 해보였다. 심지어 수년간 같은 무대에서 땀을 흘렸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조차 그의 캐릭터는 착하거나 천진무구한 쪽이었다.



사실, 임순례 감독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지상 최대의 오디션’에서 1천여명 가까운 지원자 가운데 “마치 보석으로 깎이기 전, 거친 원석 같다”며 그를 캐스팅했을 때나,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순한 강수가 강짜를 부릴 때 드러나는 폭력적인 에너지에 유독 주목했을 때 그에게선 이미 온순함과 독기가 공존해 있었다. 아마도 양극단의 조합이 효과적으로 섞여나올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로드무비>에서 심상치 않은 과거를 지니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노숙자 대식의 얼굴이 짙은 음영으로 서늘한 느낌을 주면서도 마초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나 <바람난 가족>에서 사회정의파 먹물 주영작의 냉정하고도 야비한 이중성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던 건 그 전초전일 것이다.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이 악랄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지만 어쩐지 미워하기 힘든 매력을 보여주는 건 황정민 안에 애초부터 머물던 에너지의 밀도가 더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고.



<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은 실화를 근거로 한 로맨스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과 황정민을 투톱으로 내세우면서 황정민을 ‘비장의 무기’로 꼽았다. 그간의 경력이나 가능성에 비해 덜 주목받아왔으나 드디어 물을 만났다며. 서울에서 400km 떨어진 전남 순천의 <너는 내 운명> 촬영장으로 그를 만나러갔다. 이 먼길에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동행해주었다. 며칠 전 <달콤한 인생>을 본 그가 술자리에서 “아니, 이병헌이나 김영철 선배도 훌륭하지만 황정민을 왜 인터뷰하지 않나요? 나라도 나서고 싶네요”라고 호기롭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주연급이던 <바람난 가족> 때조차 생활고로 몸으로 때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쯤 인터뷰가 끝났다. 전도연씨가 사온 <달콤한 인생> 축하 케이크를 안주삼아 술자리가 시작될 때쯤, 어느덧 그는 에이즈에 감염돼 평지풍파를 맞는 은하(전도연)를 목놓아 사랑하는 농촌 노총각 석중이 되어 있었다. 말은 없으나 약간의 홍조로 깊은 열정을 살짝 드러내면서. 일부러 찌운 15kg의 살이 한몫 했겠지만 날렵하고 부리부리한 백 사장은 깨끗이 증발해 있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YMCA야구단>



최동훈 | <달콤한 인생> 이야기부터 하죠. 원래 백 사장 역이 아니었다고요?



황정민 | 처음에는 뢰하 형이 한 문석 역이었어요. 김지운 감독님하고 리딩을 많이 했는데 문석보다는 백 사장이 더 낫겠다고 느끼신 모양이에요. 갑자기 백 사장을 해보자고 그래서 도대체 백 사장이 누구야 하고 대본을 보는데 없는 거예요. (웃음) 뭐 대본에 있긴 있는데, 감독님이 내가 하는 연기 스타일이 맘에 안 드시는가보다 했어요. 굉장히 집요하신 분이잖아요. 감독님하고 둘이서 문석 리딩할 때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어가서 좀 무서웠어요. 부담스럽고. 솔직히 배우들 리딩 하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요. 아니 그렇다기보다 리딩에 쏙 빠져들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맘에 안 드나보다 하고 못하겠다고, 감독님하고 꼭 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기회가 아닌가보다 하고 말씀을 드렸죠. 겁먹은 거죠. 따지고 보면, 내가 그 역할에 딱 붙을 수 있는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러고나서 <여자, 정혜>를 찍고 있었는데 촬영장으로 찾아오셨어요. 놀랐죠. 그때 용기를 가지라는 투로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제가 느꼈던 감정이 그랬던 거 같아요. 네가 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으니 같이 해보자고. 그래서 하게 됐어요. 감독님 힘이 컸던 것 같아요.



최동훈 | 김지운 감독님의 자세, 그거 제가 배워야 할 것 같네요. 백 사장 역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을 텐데?



황정민 | 많이 나오면 대본이 그 역할에 대해 설명을 다 해주잖아요. 백 사장 같은 경우는 툭 나오고 툭 나오고 툭 나오고 끝나요. 딱 세번. 그래서 딱 나올 때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 보이길 바랐어요. 그러려면 임팩트가 있어야 하죠. 실제로 그렇게 찍는 게 아니라 배우 스스로 그런 식으로 가져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 많이 보여줘야죠. 불필요하면 감독이 쳐내고 잘라내면 되니까. 그래서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요. 특히 외모에 대해서.



내 몸 속에 백사장을 담았어요, 그 인생을






최동훈 | 입가의 스카페이스도?



황정민 | 네. 롤랑 조페 감독의 <시티 오브 조이>를 보면, 인력거 집 딸이 볼모로 잡혀서 입이 찢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최동훈 | 외모에서 백 사장의 과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었어요.



황정민 | 원래는 그런 것들 일부러라도 신경 안 쓰는 편인데, 많이 안 나오니까 신경을 썼어요.



최동훈 | 걸음걸이, 말투도?



황정민 | 그건 일부러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라기보다 감정이 중요한 건데. 이런 사람 있잖아요. 평범한 사람은 아니고 굉장히 사이코인데 평범한 척하는 사람.



최동훈 | 오케이!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백 사장이 겉으로 하는 행동은 좀 착해 보여요. 죽는 사람도 위로해주고. 별일 아냐 하면서. 근데 진짜진짜 나쁜 놈이거든요. 겉포장은 착한 사람처럼, 화를 낼 때도 남 눈치를 좀 보면서 내가 여기서 이렇게 화를 내면 안 되지 하고 신경쓰는 인물.



황정민 | 실제로 주먹쓰는 사람들을 보면 눈을 못 마주쳐요. 대개대개 순하게 이야기하는데도 눈에 살기가 있어요. 감정적으로 이런 게 쌓여 있으면 말투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같아요.



최동훈 | 연기할 때 행동보다 어떤 인물인지 그 정신상태를 가져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죠?



황정민 |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에 MBC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양심냉장고를 처음 탔던 사람 인터뷰를 하는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자막이 나오긴 하는데,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는 거죠. 그만큼 말이 필요없고, 나중 문제라는 거죠.



최동훈 | 예를 들어 <마라톤 맨>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랑 더스틴 호프먼이 같이 나왔는데, 잠 못 자고 마라톤을 하고 온 상태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랑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 더스틴 호프먼이 실제로 잠 안 자고 막 뛰어서 촬영장에 온 거예요. 로렌스 올리비에가 여유있게 커피 마시고 신문보다가 호프먼에게 너 왜 이렇게 상태가 안 좋니 묻고는 하는 말이 연기로 하면 되잖아, 하더라는 거죠. 황정민씨는 말하자면 로렌스 올리비에보다는 더스틴 호프먼쪽인 거죠. 자신의 정신상태를 계속 그쪽으로 몰아가는.



황정민 | <너는 내 운명>의 석중 같은 경우, 내가 그 사람한테 다가가서 너 어떻게 살았니라고 물어보고 이해를 해야지, 야 이리 와봐 너 어떻게 살아? 이럴 순 없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절대로 진실을 얘기하지 않죠.



최동훈 | 백 사장의 첫장면은 정말 재밌었어요. 전화 안 받네, 끊어? 그러다가 부하를 막…. 근데 백 사장의 가장 재밌는 디테일은 피를 자기 몸에 안 묻히는 거예요. 그게 보는 사람이 느낄 정도로 굉장히 세밀하게 나와요.



황정민 | 백 사장은 얼굴의 흉터 때문에, 그게 어렸을 적에 생긴 건데, 사람들이 어? 하고 다시 보게 되는 콤플렉스가 된 건데 그걸 어떻게든 감추려고, 옷 같은 걸로 꾸밀 수 있는 반대쪽으로 자꾸 가려고 하거든요. 이런 얘기를 하니까 감독님이 그러면 피 묻히는 걸 싫어하면 어떨까 했던 거죠. 제가 하나둘을 얘기하면 제3자가 그 얘기를 듣고 플러스를 만들어가고, 또 감독님이 얘기하면 내가 또 고민하고 또 플러스 알파가 되고. 이런 상승작용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바람난 가족>, 내 최고의 연기



<로드무비>

<바람난 가족>



최동훈 |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죠. 디렉팅을 정확히 주는 감독과 느슨하게 주는 감독이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아요?



황정민 | 양쪽 다 해봤죠.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님은 전자의 경우고. 저는 느슨하게 주는 쪽이 편한 거 같아요. 기본 틀거리가 있어서 거기서 벗어나는 건 제 스스로 용납하지 않지만. 연극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공연 중간에 관객의 반응이나 그날의 변수들에서 살짝 빠져나오고 덧붙이는 재미가 있거든요.



최동훈 | 저는 <범죄의 재구성> 하면서 배우들한테 정확하게 지시하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그 신이 해야 할 목적이 있으니까요. 리허설 때 어떻게 하세요라고 하지도 않아요. 동선은 미리 정해놓지만. 그런데 보고 있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자기네들끼리 뚝딱뚝딱 뭘 만들어서 와요. 가끔 그런 생각해요. 시나리오를 같이 쓸까. 그러면 얼마나 재밌게 나올까.



황정민 | 이게 맞다, 정확하다, 고 하기보다 자기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바람난 가족>을 찍으면서도 굉장히 재밌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제가 해온 작품 중에서 최고의 연기는 주영작이란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최동훈 | 100% 동의합니다.



황정민 | 나랑 반대되고 나랑 친하지 않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꾸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멀어지는 친구였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중요한 건 작품을 하면서 맘을 다 놨다는 거죠. 대본도 안 보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일어나서 가고. 근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어, 이런 면이?’ 하고 깜짝 놀랐어요.



최동훈 | 인물을 만들다보면 중간쯤 가면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인물이 나를 조종해서 그 이야기를 가게 만들어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바람난 가족>도 그런 경험이 아니었을까요?



황정민 | 찍을 때는 스스로에게, 저는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열심히 하는 케이스인데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아무 생각없이 해도 되나 되묻고 싶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기도 했는데 어쨌든 제 스스로 묶어놓은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많이 풀어놓을 수 있었어요.



최동훈 | 제가 <눈물>의 조감독이기도 해서 임상수 감독님이랑 친하잖아요. 황정민이란 배우에 대해 물었더니, 촌놈이지 뭐, 그러더라고요. 아주 냉정하고 쿨하지 못하다는 거지. 보수적인 이미지인데, 촬영 때는 그렇게 했을지 몰라도 결과를 놓고 보면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기가 좋았어요. 임상수 감독님과 트러블이 좀 있었나요?



황정민 | 아뇨. 전혀 없었어요.



최동훈 | 아니 있었다고 해도 저는 상관없는데.



황정민 | 진짜로 없었어요. 감독님이 연기를 잘하시니까 잘 보여주기도 하셨고. 내 생각을 많이 안 하려고 배제하려고 했던 작품인데 찍고 나서 영화를 보면서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구나. 배우 스스로 끌고 가려는 부담감이 없지 않은데 그것조차도 필요없구나 싶었죠.



최동훈 | 그때 저랑 같은 장면에 나왔잖아요(한국전쟁 때 숨진 유골 발굴 현장에서 황정민은 유족들의 변호사로, 최동훈 감독은 순경2가 돼 유족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곳이 추워서 불을 쬐고 있는데 엑스트라 조합에서 온 아저씨들이, 왜 이 아저씨들이 모든 영화에 출연하니까 한국영화를 재단하고 그러는데, 황정민씨 보고 자네는 어느 조합에서 왔나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제 옆에서 뭐 저기서 왔어요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저도 추웠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아니 주연배우를 모른단 말야, 의아했어요.



황정민 | 지금도 잘 몰라요. 출연작 중에서 최고로 많은 관객이 본 영화가 <바람난 가족>인데도 몰라요. <마지막 늑대> 끝나고 <천군> 할 때 결혼식했는데 TV매체들이 좀 왔었거든요. 그거 방송 나가고나서 더 많이 알아보더라고요.







황정민은 럭비공 같은 배우라고요?



최동훈 | 저는 좋은 배우는 냉정하고 잔인한 역과 굉장히 인간적인 역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인 것 같아요. 위대한 배우는 그걸 다 보여줬고. 황정민씨는 그게 있는 거예요. 인간적인 면도 있고 정말 잔혹한 면도 있고.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전자를, <달콤한 인생>이 후자를 보여줬죠. 근데 아주 잔혹한 역을 할 때는 겉포장에서 착한 사람 같은 게 있고, 아주 착한 사람 역을 할 때는 성질날 때 팍 튀어나오는 게 있어요. 그래서 그 인물들이 아주 잔혹하거나 아주 착한 사람이 아닌, 뭔가 약간 겉과 속이 있는 인물이 돼요.



황정민 | 기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눈은 태어난 그것대로 속이지 못하는데, 그걸 바탕으로 역할에 대해 자꾸 고민하고 고민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해가는 게 있어요. 자기 최면 같아요.



최동훈 | 자기 최면이 있어요?



황정민 | 네. 평상시에는 그런 거 못 느끼는데 일할 때만큼은 좀. 성격인데 남한테 피해 안 주려고 하는 거. 이왕 영화를 한다고 했으면 그것에 맞게끔 100% 맞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죠. 아직도 헤매고 있는 중이에요.



최동훈 | 몇 사람에게 황정민씨에 대해 물었는데 그중에 제일 재밌었던 말은 다음에 어떤 역을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면 존 웨인은 한번도 변하지 않고 총잡이 역할만 하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좋아해요. 반대로 에드 해리스, 존 트래볼타, 앤서니 퀸 같은 배우는 캐릭터에 따라 바뀌죠.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관객에게 어필해야겠다라는 전략이 있나요?



황정민 | 전혀 없어요. 그냥 내 이미지는 내 이미지일 뿐이지.



최동훈 | 순간순간 바뀔 수 있다고?



황정민 | 스스로의 마음의 차이인 것 같아요.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니까. 황정민이 지닌 본래의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두세 작품 하면 끝이라고 봐요. 그렇다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뭔가. 역할의 진정성이라고 봐요. 그걸 믿어요. 나와 역할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이해하려고 고민하면 변하는 것 같아요. 오만이지만.



최동훈 | 오만은 좋은 것 같아요. 예전에 박찬욱 감독님이 그랬어요. 우리는 오만해져야 한다, 그래야 이 힘든 세상을 버틸 수 있다, 물론 남한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오만은 감독에게도 배우에게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배우를 경험하고 싶어서 몇번 해봤는데 그때마다 굉장한 불안감을 느껴요. 그 불안감이 뭔가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저 인간들이 내가 연기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고. 그래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걸 타박하죠. 아니 여기 왜 이렇게 땅이 질어, 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거죠.



감독이 얘기하는 걸 120% 이해하려고 해요






황정민 |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근데 저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는 느껴요. 연기를 하려고 하면 그 때부터 못해요.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그 상황에 있으면 그냥 스스로를 믿으면 돼요.



최동훈 | 아까 얘기한 거랑 연결이 되네요. 열려 있는 디렉팅을 주면 충분히 동화해서 갈 수 있는.



황정민 | 배우들이 얼마나 많이 그 역에 대해 고민하겠어요. 현장에 나가서 주변의 공기며 땅이며 나무 한 그루까지 자연스럽게 매치가 돼요. 자신을 믿고 느끼면 돼요. 하면 안 돼요. 임상수 감독에게 많이 배운 건데요. 연극했던 배우들의 문제는 마악∼ 연기를 하려고 해요. 하고 나면 내가 연기를 좀 했어,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마스터베이션이에요. 그게 관객에게 부담일 수 있거든요. 배우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관객을 위해서 존재하는 건데. 물론 모든 연극배우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전 그랬어요. 알면서도 잘 제어가 안 돼요.



최동훈 | 묻어나는 연기 있잖아요. <바람난 가족>에서 혼자 있는 장면은 별다른 동작이 없는데도 그 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거든요.



황정민 | 그런 부분을 느낀 거예요. 만약에 내가 좀더 생각했다면 뭔가 연기를 하려고 했을 텐데, 잔동작이든 뭐든. 그런데 감독님은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배우들은 미치는 거거든요. 이게 연기 맞나 싶어서. 영화를 보고 나니까 안 해도 더 많은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안 거죠. 그래서 <바람난 가족>을 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때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을 보고 그래 저렇게 연기 한번 해보자 싶었어요. 난니 모레티는 가만히 서 있어요, 아들 죽었는데도 멀뚱멀뚱.



최동훈 | 저의 경우는 어떨 때 그런 불안감이 들어요. 내가 만드는 영화가 평평하게 가서 너무 평범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그걸 이기면 평범해도 빛을 발하는 건데. 연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떻게 불안감을 해소하죠?



황정민 | 자꾸 반복하지만 그 역할에 대한 진정성인 것 같아요.



최동훈 | <로드무비>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이 저 인물을 잡고 가는 시각, 그걸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무얼까 싶었어요.



황정민 | <로드무비>도 그렇고 잘 모르겠어요. 뿌옇다가 차츰씩 걷히는데, <로드무비>는 계속 멍멍하게 갔던 것 같아요. 그때는 영화에 대해 잘 몰랐고, 마초적인 게이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하나하나의 행동이 거짓말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최동훈 | 혹시 자신이 마초라고 생각하나요?



황정민 | 전혀 그렇지 않죠.



최동훈 | <YMCA야구단>의 김현석 감독은 무색무취의 배우라고 하더라구요.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애초에 어떤 이미지가 없는데 원하면 나온다고.



황정민 | 그 역할을 내가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역할을 이렇게저렇게 하는 건 감독이거든요. 제3자의 역할이 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 항상 그래요. 네 생각만이 다가 아니다라고. 네가 네 자신을 못 보는데, 제3자가 너를 바라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그래서 전 감독님이 얘기하는 걸 120% 이해하려고 하지요.



최동훈 | <달콤한 인생>의 첫 촬영은 뭐였고, 어땠어요?



황정민 | 룸살롱에서 술마시다가 선우하고 마주치는 장면이었어요. 나중에 스카이라운지를 배경으로 다시 찍은 장면. 그런데 분장하고 의상 딱 입으니까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순간 피가 쫙쫙, 뭔가 근질근질거리는 느낌. 스탭도 멋있다고 하니까 더 움찔거리고.



최동훈 | 저는 그 장면 좋아하거든요. 문석(김뢰하)이 불러서 선우가 걸어와서 앉고, 백 사장은 이미 앉아 있는데 관객은 벌써부터 선우와 백 사장의 대결이라는 걸 알아요. 말은 문석이 더 많이 하지요. 그래도 관객은 말에 집중하지 않고 선우와 백 사장만 보죠. 근데 거기서 백 사장이 선우를 달래다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긴장감이 더 해요. 백 사장이 나서면 팽팽한 긴장감이 깨지죠. 그 신의 마무리는 백 사장이 위스키를 마시고 그 잔에다가 담배를 끄는 건데 무슨 말을 하진 않지만 백 사장이 선우에게 무슨 짓을 하겠군, 하고 알게 돼요. 그렇게 연출된 장면들이 좋고 관객도 배우들에게 더 집중되는 것 같아요.



황정민 | 끄는 게 대본에 있는 건 아니었고. 아니 저 자식 봐라라는 느낌의 애드리브죠. 어떨까요, 라고 감독님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니까.



최동훈 | 아이스링크에서 선우랑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꼬챙이로 아주 날렵하게 휙휙휙 찌르는데 그것도 대본에 없었을 것 같은데? 백 사장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었죠.



황정민 | 저는 백 사장의 등장보다도 죽을 때 임팩트 있게 죽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최동훈 | 죽을 때 한마디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정글쥬스>의 손창민은 ‘콧잔등이 가려워 긁어줘’ 하고 죽거든요. 재밌다 싶었는데 백 사장은 ‘아, 씨발’ 하고 죽는데, 내가 언젠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어 하는 것처럼 들려서 재밌었어요.



황정민 | 원래는 뭐였냐면 왜 총을 쏘냐라는 거였어요. 우리나라 상황에선 총 맞아 죽기 힘드잖아요. 왜 총을 쏘냐 씨발, 하고 대사를 했는데 감독님이 너무 웃기다고 해서 앞부분을 뺐죠. 그런데 찌른 행동 뒤에 흥분해서 막 주절주절 떠드는 건 수월했는데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아이스링크에서 선우를 딱 만났을 때였어요. 선우가 ‘웃어요, 웃어’ 하고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하는데 리액션들이 어려웠어요. 백 사장은 선우가 한수 위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다시 만났을 때 놀라면서 너무 놀라도 안 되고…. 그러니까 선우가 만만하면 얘가 얼마나 맞으려고 또 왔어 하는 투로 하면 되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거든요.



최동훈 | <천군>은 곧 개봉할 거고 <너는 내 운명>은 어떤가요? 살도 많이 찌우고.



황정민 | 너무 좋아서 불안할 정도예요. 감독님이랑 도연이랑 너무너무 좋아요. 집사람에게 막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의 설렘 같은 거라고 얘기했을 정도예요. 상대배우가 이렇게 고맙고 상대배우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에요.



최동훈 | 여기서 석중이라는 역에 대해 궁금한 건, 석중은 착한 사람인데 세상은 그를 착해지면 안 되게 하잖아요. 그래서 관객이 석중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보게 되고 그것으로 감정적 격정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한 복안이 있나요?



황정민 | 복안이라기보다 누구나 이런 사랑을 한번쯤 해봤으면 하는, 저런 남자 제발 한번 만나봤으면 하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면 유치해지잖아요. 자기는 모르지만. 워낙 우리나라 사랑영화들이 뭔가 장치를 많이 넣는데 그건 재미없다고 봐요. 사랑은 그냥 사랑이거든요.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정답이라고 보여주고 싶어요.



빨리 마흔이 넘었으면 좋겠어요






최동훈 | 영화작업이 갈수록 재밌죠?



황정민 | 재밌고 어렵고. 한편으론 나에 대해 굉장히 편해졌어요. 나를 들들 볶던 것들을 많이 정리하게 됐어요. 더 중요한 건 <마지막 늑대> 찍고 나서는 내가 배우를 안 하면 어때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거죠. 살날이 30년이 남았다면 10년 동안 초밥을 열심히 배워서 나머지 20년으로 잘살 수도 있는 거고. (웃음) 그래서 편해졌어요. 전 빨리 사십이 되고 싶었어요. 사십이 되면 연기 진짜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해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최동훈 | 연극판에서 ‘황정민은 날랐다’고 할 수 있는데 정말 웃겼거든요. 그때가 추운 시절이었죠?



황정민 | <바람난 가족> 할 때도 아르바이트 했어요.



최동훈 | 무슨?



황정민 | 시장에서 얼음.



최동훈 | 와, 죽인다. 얼음을 날랐어요?



황정민 | 냉동창고에서 생선박스에 얼음 채우는 거.



최동훈 | 선한 눈빛, 선한 이미지 때문에 배우로서 고민을 많이 하진 않았나요?



황정민 | 전혀. <바람난 가족>의 역할이 냉정하기는 하지만 그 눈이 어떻게 보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것 같은데 저 인간이 ‘저∼, 저’ 싶잖아요. 그런 게 그 역할을 더 풍성하게 했는데 그건 제 타고난 눈에서 나왔을 거라는, 뭐 그 정도. 선하긴 하겠지만 <달콤한 인생>에서 화를 내고 쳐다보고 하는데 절대 선하게 보이지는 않잖아요. 이번 역에서는 눈이 안 보여요. 하두 좋아서 웃느라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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